앨리스처럼 '토끼굴' 닮은 헌책방 속으로 빠져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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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0
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깨져서 더 귀한 취급을 받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긴쓰기’. 일본어로 ‘황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입니다. 깨지거나 갈라진 도자기의 틈을 옻칠로 메운 뒤 금 또는 은으로 장식하는 일본 전통 공예입니다. 신혼 살림으로 처음 마련한 접시, 연인에게 선물 받은 꽃병…. 흠이 생겨도 차마 버릴 수 없는 도자기를 고쳐 쓰던 게 예술이 됐습니다. 공장에서 수천 개씩 찍어낸 그릇이더라도 완벽히 똑같이 깨질 수는 없으니, 모든 긴쓰기 작품은 유일무이합니다.
서울 녹번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쪽문 열면 나타나는 나무계단
토끼굴 들어가는 앨리스 된 기분
5000여권 옹기종기 모여있어
'헌책방 VIP'였던 윤성근 대표
책방에 있는 모든 책 직접 읽어
별도 창고에도 2만~3만권 보관
서울 녹번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들어선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을 만날 기회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거쳐간 사람, 지나온 세월에 따라 책에는 제각기 다른 흔적이 남으니까요. 입구는 평범합니다. 1층 음식점 입구 오른쪽에 작은 유리문이 있어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문을 열면 양옆에 책이 수백 권 쌓여 있는 나무계단이 등장합니다. 고개를 들면 천장에는 책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에 빨려들어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죠.2층에 있는 이 헌책방의 면적은 100㎡ 남짓. 헌책을 수선해주는 제본공방과 반씩 나눠 쓰고 있으니 50㎡ 공간에 헌책 약 5000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윤성근 대표의 머릿속에 수만 권의 책이 더 들어있으니까요. 그 역시 어린 시절 헌책방 단골이었던 다독가죠. 윤 대표는 “인터넷으로 책 사는 시대에 헌책방까지 찾아오는 분들은 독서 내공이 보통이 아닌 독자”라며 “이들에게 책을 추천해주기 위해 헌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보는 건 물론 1년에 신간을 수백 권씩 사서 읽는다”고 해요.
예컨대 이반 일리치의 급진적 교육론을 담은 <학교 없는 사회>는 ‘헌책방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죠. 책이 절판되고 출판사마저 사라져 정가의 몇 배를 주더라도 헌책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 새 출판사에서 이 책을 다시 내요. 이때 윤 대표의 특기가 발휘됩니다. “절판된 책은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번역하고 깊이 있는 해설을 붙였기 때문에 여전히 소장 가치가 있어요.” 윤 대표는 별도 창고에 헌책을 2만~3만 권 쌓아두고 계절마다, 이슈 따라 책을 수시로 재배치합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자장수를 닮은 윤 대표의 별명은 ‘책 탐정’. 절판됐더라도 책을 찾는 애틋한 사연을 들려주면 전국을 뒤져 책을 구해주기 때문이죠. 물론 시간이 걸리지만요. 또 헌책 속 낙서를 보면서 그에 얽힌 사연을 추리하는 취미 때문이기도 해요. 그가 헌책방을 운영하며 지금껏 쓴 책만 열세 권. 최근 그가 출간한 <헌책 낙서 수집광>에는 헌책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으로 만들어주는 기묘한 낙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김OO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는 <타인최면술>,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적힌 어느 엄마의 일기…. 대부분의 헌책은 가벼운 손때만 묻었을 뿐이니 운이 좋아야 이런 ‘보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윤 대표에게 ‘헌책방에선 어떤 책이 인기가 있는지’ 묻자 “사려는 책을 정해두고 헌책방에 오는 건 하수. 헌책방에서는 책이 주인을 택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헌책방은 인터넷 서점과 달리 모든 책이 다 있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뜻밖의 발견이 가능한 곳이니까요. 그래도 ‘헌책방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알려달라고 졸라봤어요. 윤 대표는 자서전이나 평전을 권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그 인물이 쓴 다른 책, 혹은 그가 겪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책으로 독서가 막 뻗어나가게 되거든요. 진짜 토끼굴에 빠져드는 거죠.(웃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