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이 열리면…40도의 마법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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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오후 4시. 햇볕이 감싸고 있는 서울 안국동 골목. 환한 유리창을 낸 한옥 위스키 바 ‘공간’의 문이 열리자마자 하나둘 손님이 들어왔다. 금세 10여 개의 자리가 찼다. 해가 지기도 전에 위스키바를 찾아오는 이들은 누구일까.
'도시인의 아지트' 위스키바
간판 없고 입구 숨겨진
'스피크이지바' 인기
싱글몰트 위스키의
수백 가지 향이 가득
바텐더는 스토리텔러
무궁무진 '酒담화' 전해
청담·서촌·한남·연남 등
각양각색 바 분위기 매력
스니커즈에 후드티를 입고 알코올도수 40도의 위스키 한 잔을 즐기던 20대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위스키는 멋진 술이잖아요. 나에게 선물하는 한 잔의 사치이자 위로입니다.” 이들에게 위스키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컬러스 케이지가 심연에서 허우적대며 들이켜던 중독자의 술이 아니다. 동경과 위안이 담긴 청춘의 작은 사치다.
한 잔의 위로 건네는 공간
30대 회사원 천유빈 씨는 서울 곳곳의 특색있는 위스키바를 찾아다닌다. 수백 가지 싱글몰트 위스키의 맛과 향이 이색적인 공간과 조합해 만들어 내는 다양성을 즐긴다. 청담 서촌 한남 연남 여의도 용산 등 지역마다 각양각색의 위스키바들은 그렇게 ‘도시인의 아지트’로 자리잡고 있다.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르챔버’는 10년 가까이 클래식한 위스키바의 명맥을 이어왔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바텐더 대회 ‘월드클래스’의 한국 대표 출신들이 2014년 오픈한 바다. 첫 방문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수 있다. 입구의 문이 책장으로 굳게 닫혀 있어서다. 비밀의 열쇠인 책 한 권을 누르면 문이 열리고, 그제야 수많은 위스키가 진열된 백바와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마주하게 된다.르챔버와 같이 공간을 감춘 ‘스피크이지(speakeasy)바’는 위스키바를 찾는 또 다른 재미다. 스피크이지바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은밀한 장소다. 간판이 없고 출입구는 숨겨져 있다. 1920~3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에 생긴 무허가 주점이나 주류 밀매점을 일컫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명동 ‘숙희’도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 스피크이지바다. 입구로 통하는 복도 끝 앤티크한 자개장 근처엔 거울 속 공간으로 들어가는 버튼이 숨겨져 있다. 양주를 팔지만 한국의 멋과 맛을 입혔다. 한국과 일본에서 바텐더 경력을 쌓은 이수원 숙희 대표는 어머니가 그린 민화와 할머니의 서예 작품을 위스키바에 걸었다. 뉴욕에도 한국 스타일을 살린 숙희를 낼 예정이다.
지난해 10월 서울옥션 경매 최고가인 5억원의 낙찰 기록을 썼던 ‘발베니 DCS 컴펜디엄’ 풀세트 25병을 휩쓸어 간 위스키바도 있다. 2030세대 네 명의 청년들이 대표로 있는 강남구 신사동 ‘바 테제’다.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바라고 해서 가볍게 매장에 들어섰다가 메뉴판을 보면 혀를 내두른다. 국내에서 만나기 어려운 ‘더 라스트드롭’ 한정판 시리즈와 ‘버번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BTAC 조지티스태그 컬렉션을 확보하고 있다.월드클래스 임병진 바텐더의 서촌 한옥 위스키바 ‘바 참’, 개화기 경성 분위기의 한남동 ‘소코바’, 12개 로마글자로 출입을 알려주는 비밀스러운 청담 ‘트웰브’, 논현동 영동시장 흑염소집을 개조한 ‘장생건강원 바’ 등도 애주가들이 손에 꼽는 위스키바다.
‘스코츠맨’처럼 위스키 먹는 법
위스키바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 요즘 바에 가면 골든블루, 임페리얼 같은 블랜디드 위스키를 맥주에 섞은 ‘폭탄주’를 한번에 털어 넣는 무리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한 곳의 증류소에서 맥아를 원료로 만든 싱글몰트 위스키나 다양한 칵테일을 취향에 맞게 한두 잔 즐기는 문화가 대세다.위스키 전문가인 강윤수 드링크인터내셔널 마케팅팀장(사진)은 “위스키 초보일수록 바텐더와 가까운 바에 앉을 것”을 제안했다. 바텐더는 단순히 칵테일을 제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취향 전문가이자 스토리텔러다. 무궁무진한 주담화에 푹 빠질 기회다.강 팀장은 1000개가 넘는 위스키를 맛봤다. 그것도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서.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몰트 위스키 박물관인 스카치위스키익스피리언스의 최초 한국인 직원이었다. 싱글몰트 위스키 3대장 중 하나로 꼽히는 발베니의 브랜드 매니저를 지난 7년간 맡아 국내에서 위스키 ‘오픈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낸 마케팅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전해 들은 스코틀랜드 현지인들의 위스키 음용법은 예상보다 단순했다. 취향에 맞춰 고른 1온스(28.3g)의 위스키를 컵에 담아 두 손으로 쥐고 위스키 온도를 서서히 상승시킨다. 숨어있던 아로마를 깨우고 음미한다. 곁들일 안주는 물 또는 맥주. 향을 촉진시키기 위해 물 몇 방울을 위스키에 떨어뜨리거나 위스키 한 모금에 맥주 한 모금을 번갈아 마시기도 한다.
‘술의 제왕’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나 하일랜드 지역에 증류소가 몰려 있다. 글렌피딕, 맥캘란, 글렌모렌지, 로크로몬드 등이 모두 이 지역이다. 남쪽의 작은 섬 아일레이 지역에서 생산한 아드벡, 라프로익 같은 위스키를 찾는다면 ‘위스키 좀 마셔본 주당’으로 쳐준다. 섬 전체를 덮고 있는 이탄(석탄의 종류, 피트)을 활용해 위스키에서 강렬한 스모키향이 난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