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형평성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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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애리 WISET 이사장/덕성여대 약대 교수미국 유학 시절에 첫 아이를 가지게 됐다. 임신 소식을 지도교수에게 제일 먼저 말씀드렸다. 유대인 여성 과학자인 워너 박사는 나의 임신 소식에 크게 낙담했다. 당시 나는 태아에게 해롭다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사용하는 생명공학 실험을 하고 있었고, 나의 임신은 곧 그 연구를 계속하기 어렵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몹시 서운했다. 그러나 워너 박사는 임신 기간 내내 나의 훌륭한 조력자가 돼줬다. 방사성 동위원소 실험을 모두 테크니션에게 맡긴 덕분에 휴학하지 않고 제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지도 학생 중 한 명이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그제야 나는 워너 박사의 심정을 백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연구에 대한 걱정이 먼저 떠올랐지만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진심을 다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제야 학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나는 수시로 실험실을 들락거리며 학생의 컨디션을 살폈고, 그의 연구 파트를 재정비했다. 연구실 모든 식구가 한마음으로 도운 덕분에 제자는 건강한 아이를 순산했고, 그날 나는 내가 아기를 낳았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연구 결과가 더디게 나와 애가 탔지만, 품이 한 뼘 더 넉넉해진 좋은 선생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여성은 경력을 쌓아야 할 20~30대가 결혼, 임신, 출산, 육아기와 겹친다. 내가 그랬듯 많은 여성 과학자가 출산과 커리어 중 선택의 기로에 자신을 세우곤 한다. 사회적 성취에 비중을 더 둔다면 임신과 출산이 두렵게 느껴질 테고,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면 애써 쌓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포기해야 하나 싶다. 그러나 이는 선택이 아니라 균형의 문제다.
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의 주제가 ‘Embrace Equity(형평성 받아들이기)’다. ‘Equity(형평)’는 ‘균형을 맞춘 상태’를 뜻한다. 한 사람에게 한 개의 투표권을 주는 것이 ‘Equality(평등)’라면, 펜스 너머로 야구 경기를 볼 때 키 작은 사람에게 디딤 상자를 더 얹어주는 것이 형평성이다. 과학기술계에 진입한 여성이 임신, 출산 등으로 인해 이탈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모두에게 똑같은 자격과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과학기술 여성 인재 활용과 저출산 극복 차원에서도 이제는 형평의 가치를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여성을 선택의 기로에 세우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