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에 '삼선'이 웬 말?…파격적 색깔·문양으로 죽은 브랜드도 살린 패션 히피

최지희의 LUXURY
컬러풀 구찌 시대를 열다
사진=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이돌 그룹 ‘세븐틴 부석순’이 무대에서 입었던 삼선 재킷, 아디다스 아닌가요?”

지난달 패션 분야에서 유명한 온라인 커뮤니티 한 곳에는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아무리 아디다스 홈페이지를 검색해봐도 해당 제품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얼마 뒤 댓글이 달렸다. “당연하죠. 아디다스가 아니라 ‘구찌’니까요.”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라고 하면 보통 상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떠올렸다. 명품업체는 대중적인 브랜드가 죽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쌓았다. 비싼 가격에 어울릴 수 있도록 ‘일반 제품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선을 긋는 게 기본 상식으로 통했지만 ‘넘사벽 공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명품 디자이너들이 스포츠용품 메이커와 손잡으며 스스로 ‘권위’를 낮추면서다. 이런 흐름의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구찌의 전속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였다.

구찌의 문양을 입힌 아디다스 운동화 ‘가젤’
그는 지난해 6월 아디다스와 손잡고 컬렉션 ‘익스퀴짓 구찌’를 선보였다. 신발, 가방 등의 일회성 제품 협업 차원이 아니라 컬렉션 전체에 ‘아디다스 삼선’을 입혀 내놓은 것이다. 미켈레의 시도는 패션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일명 ‘구찌다스’라는 별명까지 불러왔다. 밀라노 패션쇼에서 공개된 구찌다스는 말 그대로 색깔 잔치였다. 분명 정장인데 바지 한쪽 다리에는 초록색, 빨간색의 아디다스 삼선이 그려졌다. 구찌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가방인 뱀부 백에도 큼지막하게 아디다스 로고를 넣었다.미켈레는 수렁에 빠진 구찌를 구할 총괄디자이너로 2014년 선임됐다. 그는 2002년 구찌에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첫발을 들였고 12년간 어시스턴트 생활을 했다. 패션업계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실패했다. 그러니 선임 당시 반응이 어땠겠는가. 콧대 높은 명품업계에서 비아냥거리거나 쏘아붙이는 말들이 이어졌다. “구찌가 한물가더니 이제 망하는 길로 간다”는 조롱까지 나왔다.
하지만 미켈레는 우려와 질시를 이겨내고 구찌를 180도 바꿔놨다. 올드한 이미지에 갇혀 외면받던 디자인에 과감한 색채와 다양한 문양을 넣었다. 절제되고 올드한 라인을 선보여온 패션 라인엔 레이스와 러플, 꽃무늬가 등장했다. 나비, 뱀, 벌, 심지어 미키마우스까지 등장한 구찌 컬렉션은 패션업계에 메가톤급 충격을 줬다. 미켈레는 여성복과 남성복의 경계를 허문 ‘젠더리스 룩’을 자주 내놨다. 자유분방하고 어찌 보면 특이한 이 디자인은 젊은 세대의 이목을 끌며 트렌드의 중심 자리를 차지했다.

파격적인 시도로 젊은 고객이 늘기 시작하며 스트리트 패션에서도 구찌는 높은 인기를 구가할 수 있게 됐다. 아디다스와의 협업도 이렇게 이뤄졌다. 미켈레의 취향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분석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뒷모습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정도의 긴 머리와 여성용 가죽 부츠를 고수하는 ‘패션 히피’였다.구찌에서 일하는 동안 미켈레는 브랜드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명품의 주 소비층을 4050에서 2030으로 끌어내렸다. 기존의 정석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을 섞는 ‘힙한 방법’도 제시했다. 명품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중성적 패션의 길을 열었다. 그런 미켈레가 지난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구찌와의 이별을 택했다. 구찌 입사 20년 만에, 총괄 디자이너가 된 지는 7년 만이다. 그의 빈자리를 채울 새 얼굴에 패션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