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가구면 7억 써야"…아파트 건축비 투자처 된 '이것' [이현일의 아파트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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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앞 조형작품, 비리 온상에서 예술가 전시장으로
[조경편]④아파트의 현대미술품과 디자인 조형물
아파트도 건축비 0.7%를 미술 작품에 투자
비리의 온상에서 단지의 '아이콘'으로 진화
법률에선 건축비(표준 공사비)의 0.7%에 해당하는 금액의 미술품을 단지에 설치하게 한다. 연면적에 따라 다르만 대략 2000가구 아파트면 6억~7억원 정도를 미술품에 써야한다. 6억원짜리 한 개도 가능하지만 보통은 비용을 분배해 단지 곳곳에 작품을 배치한다.그러나 예술품의 가치라는 게 주관적인 탓에 각종 비리의 온상이었다. 제도 시행 초기 일부 시행사가 발주한 아파트엔 누가 봐도 이상한 정체불명의 작품도 이따금 등장했다.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발주된 탓에 건설사는 하는 수 없이 설치 장소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가급적 안보이는 곳에 작품을 숨기기도 했다. 이후에는 표절 작품을 활용한 비리가 많았다. 재료비만 써서 다른 조형물을 베끼면 일반인들을 속일 수 있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미술품 심의도 형식적이었다.
최근엔 미술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이 같은 부조리는 설자리를 잃고 있다.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4구역 재개발조합에선 조합장이 인허가도 끝나지 않았는데 조형물 계약부터 한 사실이 적발돼 해임됐다. 지자체의 미술품 심의도 엄격해졌다. 서울시의 경우 최근 신청 작품의 절반 정도가 탈락할 정도다. 심의 결과도 인터넷에 투명하게 공개한다. 신축 아파트에선 조각 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이 시도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작년 입주한 계림아이파크SK뷰의 중앙광장엔 '미디어 파사드'라는 작품이 설치됐다. 아래 사진의 검은 돌·금속처럼 보이는 주사위 모양 조형물은 겉면이 모두 미디어 스크린이다. 밤이면 화려한 색의 불빛이 나오면서 단지의 상징이 됐다.
아파트 지상을 미술관 앞마당으로
건설사들의 조형물에 대한 안목도 높아져 고급 아파트 단지에선 비싸도 검증된 작가의 작품을 사용하며, 공모전을 열어 조형물을 선정하기도 한다. 현대건설은 2021년 서울시가 개최하는 서울국제조각페스타와 업무협약을 맺고 힐스테이트에 설치할 미술품 공모전을 동시에 열었다. 미국 일리노이대 건축학과 교수인 작가가 참여할 정도로 호응도가 높았다. 4개의 수상작을 선정해 힐스테이트레이크송도3차와 힐스테이트부평 등 4개 단지에 설치하기로 했다.미술 작품을 몇 점 놓는 수준을 넘어 단지 전체를 현대미술관 앞뜰처럼 꾸미는 방식도 확산되고 있다. 조경을 폭포나 연못 등 전통 자연 중심으로 꾸미는 대신 인공 분수와 각종 인공 조형물로 채우는 방식이다.휴게 시설을 조형 예술품에 가깝게 만든 사례도 있다. 서울 반포동 디에이치반포라클라스에 설치된 '클라우드워크파빌리온' 은 네덜란드의 패턴 디자이너 카럴 마르턴스(Karel Martens)와 건축사무소 '건축농장' 최장원 건축가가 협업해 만들었다. 거울 연못위에 하얀색으로 설치된 이 작품은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인 레드닷, 미국 굿디자인, 아시아 디자인상 등 디자인 공모전에서 지난해 잇따라 상을 받았다.
3D프린터, 재활용 소재 활용 조형물 확산
현대건설은 아모레퍼시픽과 손잡고 화장품 공병에서 나오는 폐플라스틱을 조경에 활용하기도 했다. 플라스틱 공병 분쇄물을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와 혼합한 건설용 테라조 타일을 만들어 힐스테이트 수지구청역 등의 티하우스 마감재로 사용했다. 폐플라스틱 조각이 콘크리트와 섞여 반짝이는 효과를 내면서 디자인 요소로 사용된 것이다.
재활용 플라스틱 혼합 콘크리트로 조형물 가벽을 만드는 아이디어도 단지에 적용했다. 오는 4월 입주 예정인 '힐스테이트 포항'에는 아파트 저층 가구 앞 공간에 재활용 테라조 타일로 만든 조형 가벽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면 파스텔톤 바다 무늬의 조형미를 느끼게 해주면서, 1층 세대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안쪽에서 창문앞에 섰을 때 앞을 가리지 않는 높이로, 적당한 간격으로 설치됐다. 이 조형 가벽도 아시아 디자인상(Asia Design Prize 2023) 을 받았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