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자유 잃어도 지위 못 잃어…석방 거부한 '감옥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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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게임벤은 ‘감옥의 변호사’로 불렸다. 그는 열네 살 때 친구를 죽이고 수감됐다. 다들 그를 무가치한 인간으로 취급했다. 삶에 희망은 없었다. 그러다 공부를 시작했다.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고 형사학 박사과정까지 밟았다.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재소자들을 도왔다. 변론을 맡아 가벼운 처벌만 받도록 했다. 그가 가석방 심사 때마다 문제를 일으켜 교도소에 남으려고 한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2012년 47세의 나이로 석방됐을 때, 그는 재소자들 사이에서 누렸던 모든 지위를 잃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돌아가 버렸다.
윌 스토 지음 / 문희경 옮김
흐름출판 / 448쪽|2만4000원
영국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저자
감옥에서는 인정받았던 권위
출소하면 잃을까봐 가석방 거부
SNS서 '좋아요' 얻으려는 심리도
집단에서 지위 얻으려는 본성
벤의 사례는 <지위 게임>에 나오는 일화다. 영국 탐사보도 언론인인 윌 스토가 쓴 이 책은 ‘지위 게임’이란 관점에서 세상일을 바라본다. 스토는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좋아요’ 경쟁과 ‘마녀사냥’, 독일을 2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은 히틀러의 선동, 좌절한 외톨이의 연쇄살인 등의 이면에 모두 지위 욕구가 중요한 동인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관계를 맺고 지위를 얻으려 한다. 집단에 수용되고 집단 안에서 지위를 얻으려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이 인생의 게임이다.”다섯 살 아이도 지위 욕구가 있다. 상으로 주는 토큰을 2개씩 모두 공평하게 받는 것보다 다른 아이들은 하나도 못 받아도 자기만 하나만 받는 쪽을 택한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임금 인상보다 승진을 택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 자동차 제조사들은 ‘긴 차가 지위의 상징’이라고 부추겼다. 소셜미디어도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다. 소셜미디어는 누가 더 화려한 삶을 사느냐, 누가 더 ‘좋아요’를 많이 받느냐를 겨루는 장이다.
지위 게임은 냉혹하다. “남을 깎아내려서 나를 높여야 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지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같이 높은 지위를 가질 순 없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아무런 악의가 없는 발언에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분노를 표출한다. “온라인 군중은 희생자를 설득해서 자기네 쪽으로 포섭하려 하지 않는다. 희생자의 지위와 상징을 최대한 제거하려 하고,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평판을 죽이려 한다. 명성의 게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살인 방법이다.”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지위를 잃은 사람들은 삐뚤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폭력을 수반한다. 책은 미국의 연쇄살인범 에드 켐퍼와 엘리엇 로저, ‘유나바머’로 불렸던 테러범 테드 카친스키를 예로 든다. 이들은 지능이 높았다.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나르시시스트였다.
지위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을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집단 단위에서도 나타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그랬다. 전쟁 전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전한 나라였기 때문에 박탈감이 더 심했다. 그때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독일은 우수하며, 이를 시기한 주변국의 계획적인 음모에 당한 것이라고 선동했다. 마치 사이비 종교 같았다. 사람들은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여겼다. 다시 옛날의 영광을, 지위를 되찾을 것이란 희망에 나치의 선전에 동조했다.
지위 욕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학자, 기업가, 운동선수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정을 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발전이 이뤄진다. 하지만 지위에 집착할 때, 타인을 착취하는 등 잘못된 방법으로 이를 추구할 때 ‘괴물’이 된다. 이 책은 독자들이 그런 괴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심리학과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연구를 담고 있지만 학술서는 아니다. 모든 것을 지위 욕구로 설명하려다 보니 무리한 논리 전개도 보인다. 하지만 지적인 에세이로 본다면 훌륭한 책이다. 한국에서 에세이는 수필로 번역되지만, 외국에선 글 쓰는 사람의 생각과 주장을 담은 모든 글을 에세이라고 한다.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흥미진진하게 엮어내며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