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열네 살에 '남장'하고 조선팔도를 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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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 크러시순조 30년(1830년), 한 소녀가 남장한 채 집을 나섰다. 이때 나이는 고작 열네 살. 충북 제천의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을 거쳐 금강산과 설악산을 누비고, 마침내 한양의 남산까지 올랐다. 19세기 조선의 여성 시인 김금원 이야기다. 그녀는 여성의 몸으로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서 여행을 통해 세상을 만났다.
임치균 외 지음
민음사
340쪽│1만9000원
<조선의 걸 크러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여성들을 조명한다. 조선시대 문학과 역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기록의 나라’ 조선은 적지 않은 여성을 문자로 담아냈다. 국가 공식 기록뿐만 아니라 민간 야담집에서도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도 있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이 여럿이다.한국학 연구자들이 실제 역사와 고전소설에서 발굴해 정리한 책 속의 40가지 이야기는 조선 여성에 대한 오해를 깨부순다. 궁중 여성들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강렬하고 매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원수를 직접 처단하고, 뛰어난 기개와 재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르며,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은 조선시대 사회상을 다양한 여성을 통해 보여준다. 남편의 이혼 청구에 9년간의 소송으로 저항한 신태영의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민낯을 드러낸다. 소설 <방한림전>의 동성혼 서사에서는 태동하는 여성주의를, 소설 <이춘풍전>에서는 흔들리는 남성 우위를 읽어내 조선 말의 급변하는 질서를 살펴본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됐다. 조선 여성들이 가녀리고 연약했으리란 선입견을 바로잡는 1부 ‘복수자들’로 시작해 ‘영웅의 기상’ ‘쓰고 노래하다’ ‘사랑을 찾아서’ ‘뛰어난 기개와 재주’ 등의 주제를 다룬다. 책에 등장하는 조선 여성들은 군대를 지휘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한다. 한편 사랑을 위해 모든 손해를 감수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자기가 인생의 엑스트라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은 당신도 바로 상상만 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