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스탠퍼드 중퇴생 vs 서울대 중퇴생

창업·의대行, 명문대생 진로 대조
청년 엘리트의 꿈이 사회의 미래

윤성민 논설위원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들이 동문 현황을 조사해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통한 스탠퍼드의 경제적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1930~2010년 스탠퍼드대 동문이 세운 기업은 3만9900개, 그 자산을 합하면 세계 10위 국가 경제 규모(2010년 기준)와 맞먹는다. 이들 기업이 창출한 일자리는 540만 개에 이른다.

스탠퍼드대를 ‘기업가정신의 산실’로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프레더릭 터먼 공대 학장이다. MIT 교수로 있다가 결핵 치료를 위해 따뜻한 캘리포니아로 온 터먼은 학교 주변에 온통 과수원만 있어선 미래가 없다고 봤다. 그는 학생들에게 안정된 동부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학교 인근에서 창업하라고 독려했다. 그의 권유로 스탠퍼드대 출신들이 설립한 실리콘밸리 ‘차고 창업(garage startups)’ 1호 기업이 hp다.터먼은 연구단지를 조성해 졸업생의 창업을 지원하고, 교수에겐 기업 임원 겸직을 허용했다. 터먼 정신을 좇아 스탠퍼드 출신들은 무수한 혁신 기업을 탄생시켰다. 구글, 야후, 시스코시스템스, 테슬라, 엔비디아, 나이키 등 일일이 꼽기도 힘들다.

요즈음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신흥 기업가는 아예 스탠퍼드대 졸업장마저 내팽개친 중퇴생(dropout)들이다. 챗GPT 열풍의 주역인 오픈AI 설립자 샘 올트먼과 25세 나이로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자율주행차 센서·라이다 기업인 루미나테크놀로지의 오스틴 러셀이다.

올트먼은 컴퓨터공학과를 2학년 때 중퇴하고 위치기반 스타트업을 차려 대박을 친 뒤 일론 머스크와 함께 오픈AI를 세웠다. 물론 머스크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에 등록한 지 이틀 만에 “더 배울 게 없다”며 창업에 나선 인물이다. 두 살 때 원소주기율표를 외우고 열 살 때 닌텐도 게임기를 개조해 휴대폰을 만들 정도로 천재인 러셀이 스탠퍼드대 물리학과에 다닌 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다.한국 명문대생도 적잖은 수가 대학을 중퇴한다. 지난해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자연계열 학생 중 1421명이 중퇴했다. 2020년 893명, 2021년 1096명 등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잘 아는 대로 SKY 중퇴생의 80~90%는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로 이동했다. 학부모 사이에서 서울대 이공계를 다니다가 지방 국립대 수의대로만 옮겨도 성공적인 메디컬 진입 케이스로 통하는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만큼 사회 변화를 정확히 반영하는 지표도 없다. 조선시대 이래 공무원이 늘 꿈의 직업이었다면 이젠 정년도 없이, 경기도 타지 않으며, 18년째 정원이 동결된 의사와 같은 메디컬 분야가 이른바 ‘원톱 잡’이다. 메디컬 분야 자격증은 가장 안정된 삶의 보증 수표이며, 기득권층 진입을 향한 입장권인 셈이다.

한 사회의 미래는 젊은 엘리트의 포부에 좌우된다. 과거 급제로 관리가 되는 것 외에는 꿈이 막혀 있던 조선시대 기득권 사림이 내세운 슬로건은 ‘무본억말(務本抑末)’, 곧 농업만 장려하고 ‘말리(末利)’를 좇는다는 상공업을 경멸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결국 망국의 운명을 맞았다. 모두들 쪽박만 피하자고 하면 대박이 올 가능성은 애초 없다. 루미나테크놀로지의 러셀은 실리콘밸리의 대부 피터 틸이 만든 재단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창업 전에 대학을 자퇴해야만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 사회는 기득권을 저버린 ‘해적(pirates)’을 추앙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현실에 안주하는 ‘해군(navy)’만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