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한국이 대만에 역전당한 이유

정인설 워싱턴 특파원
2019년 7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차이 총통은 미 정계 고위 인사를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4년이 지난 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다음달 미국을 찾는 차이 총통을 보려는 미국 정치인이 줄을 섰다. 미국 내 권력 서열 3위인 케빈 매카시 하원 의장도 차이 총통을 만날 전망이다.

차이 총통의 인기만큼이나 그사이 대만의 위상도 올라갔다. 한국과 비교해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한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대만에 역전당했다. 2002년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은 지난해 3분기부터 TSMC에 뒤지고 있다. 대만의 반도체산업 진흥 프로젝트 일환으로 1987년 공기업으로 설립된 TSMC는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8년만 해도 삼성의 반도체 매출(86조2000억원)은 TSMC(42조1000억원)의 두 배가 넘었다. 4년 만에 양국 반도체의 지위가 뒤바뀐 셈이다.

'인플레 청정국' 된 대만

인플레이션 대응만 봐도 대만은 남다르다. 인플레가 극에 달한 지난해 대만의 물가상승률은 2.7%였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그토록 염원하는 물가 목표를 대만은 이미 지난해 이룬 것이다.

대만이 꿈의 물가 상승률을 달성한 배경이 뭘까. 정부 주도형 에너지 공급 체계가 첫째 이유로 꼽힌다. 지난해 대만 정부는 원유 가격을 통제하고 공공요금도 동결했다. 대중교통 요금도 올리지 않았다. 대만은 여기에 쓸 재정에 여유가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실탄을 다 써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각종 공공요금을 뒤늦게 올릴 수밖에 없었던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다음은 낮은 임금이다. 미국은 임금발 인플레로 신음하고 있지만 대만은 다르다. 대졸자 평균임금이 한국의 70~80% 수준이다. 임금이 더 낮은 중국과 맞닿아 있는 영향이 크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TSMC 같은 잘나가는 반도체 회사의 신입사원 임금은 한국의 삼성전자보다 높다. 어지간한 의사보다 잘 벌어 대만에선 여전히 공대에 수재들이 몰리고 있다.

원화보다 안정적인 대만달러

강한 대만달러도 빠뜨릴 수 없는 강점이다. 안전자산 수준은 아니지만, 대만달러는 한국 원화만큼 변동성이 크지 않다. 강달러로 인해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15% 가까이 떨어질 때 대만 달러는 7% 하락하는 데 그쳤다. 이런 안정성 덕분에 대만 정부는 국제 원유나 가스를 수입할 때 드는 비용이 덜 들었다. 정부 재정도 아끼고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한 비결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원화 평가절하폭이 커서 에너지 수입 비용이 늘어 12개월째 무역수지 적자의 늪에 빠져 있다.

환율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통화가치는 그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대만이 한국보다 훨씬 탄탄하다는 방증이다. 같이 반도체로 먹고사는 나라지만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는 변동성이 큰 한국의 메모리반도체와 다르다.

한국이 수십 년간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극일(克日)에만 신경 쓴 사이 조용히 치고 올라온 대만을 간과한 건 아닌지 곱씹어볼 일이다.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대신 대만을 만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