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첨단 산단, 반도체 패권 경쟁의 교두보다

반도체 설비투자, 촌각 다퉈야
한국 경제의 생존이 걸린 문제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모든 일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그 시기와 장소가 들어맞지 않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일에 실패하면, 그 실(失)의 여파는 경우에 따라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반도체산업, 더 크게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그런 운명의 기로에 놓여 있다. 세계 반도체산업에서 ‘전쟁’과 같은 치열한 경쟁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는 첨단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520억달러 규모의 투자지원 법안을 통과시켰다. 조 바이든 정부도 지난달 28일 관련 세부지침을 발표해 외국 기업에 대한 초과이익 공유 의무, 보조금으로 배당금 지급 금지, 인력 양성 의무, 핵심 정보 공개 등 많은 규제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에서의 합작투자와 라이선스 계약 체결 불가, 그리고 향후 10년간 중국 내 투자 확대와 공장 증설 금지, 공동 기술개발 불가 등 매우 촘촘한 규제를 통해 자국 경제안보 차원으로 반도체산업을 내수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현재 10%에서 2030년 20%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460억달러 규모의 투자 지원정책을 준비 중이다.일본은 국가전략산업으로 반도체산업 부활에 나선 상황이다. 반도체 생산거점 확보, 설비보수, 연구개발(R&D)에 57억달러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고 대만 TSMC 공장 유치를 위해 35억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대만도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법인세 면제와 인력 지원, 과학단지 조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035년까지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 자립을 국가 전략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각국의 투자 경쟁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도체 수출이 15% 줄면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감소한다는 거시경제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반도체산업은 너무나 중요하다.

첫째, 반도체산업은 타이밍 산업이라는 인식이다. 경쟁 기업보다 먼저 첨단 공정을 개발하고 대량생산 체제를 빠르게 구축하는 것이 성공을 좌우한다. 우리의 반도체산업 단지는 2030년 이전에 생산능력이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또 미국의 반도체산업 법안 세부지침이 시행되고 반도체 생산의 자국화가 본격화하면 중국 내 생산 거점 활용이 불가능해지고, 신규 투자 시기를 놓친 상태가 될 것이다. 반도체산업은 투자부터 생산까지 5~7년 이상 걸리므로, 지금 추가적인 산업단지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2030년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뒤처질 것이다.둘째, 반도체산업은 미래 세대를 위한 산업이라는 인식이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정부는 철강 및 조선산업 등을 국가전략산업 차원으로 지원했고 기업들도 대대적으로 국내 투자로 화답했기에, 지금 우리 세대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국내 반도체에 투자하고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 세대의 경제적 번영과 한국 경제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분쟁으로 미국의 탈중국화가 가시화했고, 중국의 기술 탈취 문제는 각국의 경제안보마저 위협하고 있다. 우리가 기존과 같이 해외 의존적인 공급망을 그대로 유지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에 자멸과 같은 선택이 될 것이다. 국내 반도체 투자와 공급망 구축은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한 일이다. 정부가 첨단전략산업의 일환으로 반도체 신규 단지를 지정한 것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