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유연근로 필요한 생산직 소외시키고, 사무직 MZ 말만 듣나"

현장에서
안대규 중기과학부 기자
< “주69시간 철회하라” 민주노총 기습시위 > 고용노동부 주최로 15일 장교동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부 장관(가운데)을 향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관계자들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과연 젊은 화이트칼라(사무직) 종사자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대표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께서 생산직 MZ세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지 의문입니다.”

낙담과 실망이 뒤섞인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수도권의 한 전자부품업체에서 일하는 이모 대리(32)는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소식에 “생산직은 또래 내에서도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모양”이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정부가 갑작스런 대통령 지시로 기존 근로 시간 개편안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중소기업계와 생산직 근로자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업종 특성을 반영해 ‘일이 몰릴 때 더 일하고, 일이 없을 때 몰아 쉬는’ 근로 시간 유연화를 정부가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소 제조업 및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MZ세대 근로자들은 자신이 ‘의견수렴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데 분개하고 있다. 월급제인 사무직과 달리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시급제 제조업 종사자야말로 근로 시간 개편의 주 대상자임에도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됐다는 것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5일 간담회를 한 MZ노조도 대기업·공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무직이 중심이다.반도체와 자동차, 선박, 기계 등 제조업을 떠받치는 57만9000개 업체 중 99.7%가 중소기업이다. 종사자는 339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경제의 주축인 생산직 근로자의 상황은 열악하다. 경직된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되면서 연장근로가 막혀 수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제도 시행 후 중소 조선업 근로자 월급이 평균 60만원 감소했다는 조사(중소기업중앙회)도 있다.

한 대형 조선소 협력사에서 10년간 근무한 30대 초반 A씨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중요하지만, 도저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근 후 밤 10시까지 대리운전을 뛴다”고 했다. 건자재업계에서 일하는 30대 B씨도 “회사에 일감이 생겨 연장근로를 하면 한 명도 예외 없이 좋아한다”고 전했다. 한 발전설비업체 대표는 “MZ세대가 오히려 집중적으로 근무하는 것을 선호해 최근 ‘3조 3교대’근무 체제에서 12시간 연속 일하고 몰아서 쉬는 ‘4조2교대’로 바꿨다”고 말했다.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루는 정보기술(IT) 스타트업도 분위기가 다르지 않다. 대기업·공기업의 일부 화이트칼라를 제외한 상당수 MZ세대에게 근로시간제 개선은 간고한 생계 부담을 덜 절박한 전제조건이다.

정부가 개편안에서 더 후퇴할 경우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부추겨 생산성이 떨어지고 글로벌 경쟁력도 추락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해야하는 뿌리기업이나 기후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건설업의 타격이 클 것이란 전망이다. 한 조선협력사 대표는 "이번에 근로시간 개편에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 조선업은 미래가 없다"며 "납기경쟁력, 인력확보 등 면에서 뒤쳐져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일감이 몰리는 데 납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 대부분 몰래 일을 더 하는 형편"이라며 "국내 조선 협력사 가운데 주52시간제를 제대로 지키는 곳은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일각에선 근로시간 개편안이 시행되면 초장기 근로라는 ‘노동 지옥’이 펼쳐진다며 불안을 키운다. 하지만 이는 중소기업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중소기업의 평균 근속연수는 3.8년, 1년 내 이직률은 20%를 넘는다. 부족 인력만 56만 명에 달한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함부로 야근을 시켰다간 직원은 떠나고 사장은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직원들 휴가를 안보냈다간 나중에 돌려줘야할 연차 수당이 수천만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며 "중소기업도 예전과 달리 근로자 눈치를 많이 보는 형편”이라고 했다.

근로시간 개편안엔 ‘주 69시간 근로제’라는 터무니없는 낙인이 찍혀 있다. 어쩌다 한 번 쓸 수 있는 노동 최대치를 마치 매주 강요받는 것처럼 호도한 것이다. 정부 개편안에 따른 연간 최대 근로시간은 2528시간으로 현 주 52시간제(연간 2712시간)보다 184시간 적다(중기중앙회). 정부 개편안에 따르면 기본 근로 40시간에 연장근로 29시간으로 총 69시간을 특정 주에 썼을 경우, 그 달의 남은 연장근로 한도는 월 최대 한도(52시간) 감안시 23시간뿐이다. 주 69시간을 2주연속 쓸 수 없을 뿐더러 나머지 3주간은 남은 연장근로 한도(23시간)를 쪼개 써야해 사실상 ‘주 47~48시간제’를 넘어선 안되는 것이다. 전직 고용노동부 출신 관료는 “정부 개편안을 주 69시간제라고 부른다면 미국은 ‘주 N시간제’이고, 일본은 ‘주 78시간제’로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다. 일본은 기본 근로 주 40시간에 연장근로 한도는 월 45시간, 연 360시간이지만 갑자기 주문량이 폭증하는 상황시 월 100시간, 연 720시간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주 6일간 하루 11시간 가량 근무하는 극한 상황을 가정해 '주 69시간제'라고 표현한다면 일본은 적정 수면·식사·출퇴근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3시간(오전 9시 출근, 자정 퇴근) 근무해 '주 78시간제'도 가능한 것이다. 미국은 기본 근로 주 40시간에 연장근로는 사실상 제한이 없다. 애플 출신의 한 사업가는 “미국 IT 개발자는 새벽1~2시까지 일하는 것은 기본”이라며 “일한 만큼 개인에게 성과금이 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도 연장근로 한도를 법으로 막을 필요성을 못느낀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야당과 노동계가 극단적으로 일감이 몰려 어쩌다 한 번 쓸 수 있는 노동 최대치를 마치 매주 쓸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며 "정부개편안은 '주 69시간제'가 아니라 '월평균 주52시간제'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세대의 의견을 면밀히 청취하라”고 지시했다. 과연 대통령에게 현장 대다수의 목소리가 전달될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