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SG, 정치화·규제화 넘어서야

[한경ESG] 칼럼
이민호 법무법인 율촌 ESG 연구소장. 사진. 본인 제공
ESG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데는 초기에 유엔의 기여가 컸다. 2000년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 출범을 시작으로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까지 나오면서 ESG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당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평화, 빈곤 퇴치, 인권 증진 등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ESG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했다. 필자는 마침 2005년 말 두바이에서 당시 아난 사무총장이 자예드 환경상을 수상하는 행사에 참석해 큰 박수를 보낸 적이 있다. 근원적으로 성찰하면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해 이 환경상을 수여했을 것이다.최근 ESG 투자 열기가 식어간다는 시각이 있다. 모닝스타의 글로벌 자금 흐름 분석 결과, 2022년 ESG 펀드로의 자금 유입은 전년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사실 감소 경향은 ESG를 제외한 전통적 펀드도 비슷했고, 감소폭은 오히려 더 컸다. 국제금융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인플레이션 우려, 러·우전쟁, 경기침체 등 요인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영향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4분기 이후에는 지속가능성 펀드로 유입액이 증가했으나 이 반등은 유럽이 주도하고 있으며, 미국은 아직 반등에 이르지 못했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지난 1월 다보스포럼 인터뷰에서 사뭇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블랙록의 ESG 확산 노력을 일각에서 ‘악마화(demonize)’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정부가 앞장서는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 진영 간 공방 재료로 ESG가 이용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에 따라 주(州)법으로 ESG 투자를 제한하거나 촉진하는 규제가 도입되고 있으며, 주의 공적 기관이 ESG 요소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부터 화석연료 기업과 거래하지 않는 금융기관 배제까지 다양한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플로리다, 인디애나, 미시시피를 포함해 14개 주에서는 ESG 투자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정한 반면, 일리노이와 메릴랜드, 뉴멕시코, 오리건 등 일부 주에서는 ESG 요소를 고려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나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 노동부는 ESG를 투자전략에 반영할 수 있도록 투자 지침을 개정했지만, 이에 반발해 공화당이 개정 지침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3월 초 상․하원에서 통과시켰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번째 거부권을 이 무효화 법안에 행사했다. ESG를 둘러싼 미국 내 갈등이 어느 정도 수위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4월 기업의 기후 공시 의무 수위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예정이다. 래리 핑크 회장은 앞선 인터뷰에서 블랙록이 ESG에 대한 정치적 반발로 타격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고사(dehydrate)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ESG 투자 반대 영향으로 인해 40억 달러의 자금 유입이 줄어들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운영자산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미국에서만 2300억 달러가 추가 유입되었다”며 대세에 영향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다. EU와 미국 경제를 함께 주목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느 한쪽만 바라볼 수는 없다. ESG가 정부 주도, 특히 규제형으로 확산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쭉 있어왔다. 정부가 지난 2월 ‘민관 합동 ESG 정책협의회’를 결성해 민간과 공동으로 정책 방향을 정하기로 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결정이다. 당위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ESG가 규제 혹은 정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안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정치의 파도가 아니라 보편적 당위와 시장에 순응하는 ESG 정책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이민호 법무법인 율촌 ESG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