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외국어 잘하는 비결은 '콘텐츠'

이기정 한양대 총장
영문과 교수로 살면서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하는가”이다. 외국어 학습의 효율성에 관한 얘긴데 이와 관련해 외국 출장 중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십년은 됐을 거다. 옆자리 승객은 유럽 출신의 아마도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신사였다. 도착해서도 할 일도 많고 무척 피곤하던 터라 눈을 붙일 심산으로 기내에 오른 참이었는데 이륙하자마자 그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살짝 피곤이 가중되는 듯했다. 게다가 영어를 쓰는가 싶더니 나의 국적을 확인하곤 그 신사는 이내 무척 알아듣기 힘든 한국어로 전환을 시도하는 게 아닌가. 속으로 ‘그냥 영어를 쓰는 게 이해하기는 좋을 것 같은데’ 싶었지만 ‘아니지, 이런 한국어로 얼마나 가겠어? 금방 끝날 테니 오히려 잘된 거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잠깐만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일순간이나마 나 역시 나라를 대표하는 신사로서의 품격은 보여야 했으니 말이다.그런데 우리의 대화는 멈출 줄을 몰라 태평양을 한참 건너갈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그때의 이야기는 외국어 학습에 대해 강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단골 소재가 됐다. 사실 그의 언어에 빠져든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도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김소월, 한용운 등을 줄줄이 언급하는 그의 얼굴은 마치 무슨 광채라도 나는 것 같았고, 기능면으로 살짝 부족한 그의 외국어는 내게 대화자로서의 협력과 완성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 이거였구나.’ 순간 언어학 교육학 심리학 등 숱한 서적의 글자들이 죄다 일어나 한 방향으로 화살표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른바 ‘콘텐츠(contents)’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외국어를 지속시킨 힘은 어려운 문법도, 고급스러운 어휘도, 정확한 발음도 아닌 그야말로 깊고도 풍성한 내용이었다. 생활 한국어 몇 마디였다면 그 대화가 5분이나 지속되기는 했을까?

이야깃거리가 그렇게 중요한 거다. 화제를 지닌 사람은 대인 매력의 으뜸가는 요소를 갖췄다고 한다. 어쩌면 언어로 콘텐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언어를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contents’를 비롯해 ‘contain’ ‘continue’라는 말이 모두 ‘함께(together) 유지하다(hold)’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걸 보면 우리를 결속하고 지속하는 힘은 역시 콘텐츠이기는 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