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연주 즐기며, 명화 도슨트…화학회사가 만든 '美食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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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대신 작곡 전공 '3세 경영인'연세대와 명지대 사이, 서울 연희동은 ‘보석’ 같은 가게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 사이마다 각자의 분위기를 뽐내는 맛집과 카페들이 숨어 있다.지난해 12월 이곳에 자리 잡은 타이 레스토랑 ‘사색연희’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일반 음식점과는 뭔가 다르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은 클래식과 재즈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연장이 된다. 분기에 한 번씩은 미술관처럼 여러 작품을 도슨트가 설명해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그래서인지 사색연희에 ‘공연을 즐기러’, ‘작품을 감상하러’ 온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복합문화공간이야 요즘 흔해졌지만 사색연희처럼 수준 높은 음악과 미술 작품, 미식이 한데 모이는 공간은 드물다. 이쯤 되면 질문이 나온다. ‘대체 이런 공간은 누가 만든 거야?’
신사업으로 스마트팜에 도전장
"자체 브랜드 갖춰야만 생존"
연희동에 복합문화공간 만들어
2층 단독주택이 '도시 농장'으로
메리골드·비올라·애플민트 등
365일 신선한 작물 공급 가능
셰프들 손 거쳐 퓨전음식으로
음식점 곳곳에 걸린 명화
호림박물관 만든 할아버지 영향
수년간 발품 팔면서 컬렉팅
클래식·재즈 마니아도 사로잡아
음대 나온 화학회사 CEO
사색연희를 만든 건 농작물보호제 제조기업 성보화학이다. 창업주인 호림 윤장섭의 손녀이자 윤재천 전 성보화학 대표의 딸인 윤정선 대표(47·사진)가 기획했다. 화학회사가 음악·미술을 즐길 수 있는 음식점을 만들다니. 언뜻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 하지만 윤 대표의 이력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대학교 때 작곡을 전공했어요. 회사를 물려받으려면 경영을 전공했을 법도 한데,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말씀해주신 아버지 덕분에 음악을 시작했죠. 2007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회사에 들어오게 됐고, 이후에도 예술과 관련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은 멈출 수가 없었죠.”그렇게 품어온 꿈은 성보화학이 ‘스마트팜’ 사업을 시작하면서 현실이 됐다. 바질, 버터헤드, 이자트릭스, 와일드루꼴라 등 특수 채소와 작물을 스마트 재배기(인큐베이터)에서 길러 유통하는 사업이다. 처음엔 별도 브랜드 없이 온라인 채널을 통해 판매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채소들과 뒤섞여서 팔리는 걸 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성보화학만의 브랜드를 갖춰야 다른 회사의 스마트팜과 차별화되는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마트팜에서 키운 친환경 작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음악, 미술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스마트팜에서 피어난 문화의 꽃
연희동 한복판에 둥지를 튼 사색연희는 그 고민의 결과다. 서울 신사동과 여의도동 IFC몰에 있는 샐러드 카페 ‘윤잇’에 이어 성보화학이 세 번째로 내놓은 스마트팜 레스토랑이다. 대지면적 400㎡, 실내면적 200㎡ 규모의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들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왼쪽 유리창 너머로 푸른색의 작물이 여럿 보인다. 메리골드, 비올라, 애플민트 등 쉽게 볼 수 없는 작물들이 인공 빛 아래에서 자라고 있다. 윤 대표는 “더울 때나 추울 때나 365일 안정적으로 작물을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자란 작물들은 사색연희 셰프들의 손길을 거쳐 플라워섬머롤, 똠얌꿍, 꺼무양 등 태국 현지 음식으로 식탁에 오른다. 그가 태국 음식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신선한 채소와 다양한 허브가 맛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메뉴가 많기 때문이다."예술가와 함께 크는 공간 만들 것"
신선한 음식과 함께 분위기를 더 돋우는 건 음식점 곳곳에 있는 그림이다. 모두 윤 대표가 수년간 직접 발품을 팔아 모아온 국내 신진·중견 작가들의 작품. 화려하게 만개한 꽃 사진을 하나하나 오려 붙인 권선영 작가의 콜라주 작품 ‘가든’은 마치 꽃밭에 소풍을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계단을 올라갈 땐 윤가림 작가가 한 땀 한 땀 종이에 수를 놓아 만든 사슴이 눈을 사로잡는다. 2층 창가 옆 기타 초크 모양의 테이블 뒤에 걸린 홍정우 작가의 청록색 추상화는 햇빛의 방향에 따라 여러 색깔을 내뿜는다.“호림박물관을 세우신 할아버지,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 등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언젠간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모아왔죠. 앞으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유망한 작가들의 작품도 걸어놓을 생각이에요. 사색연희가 한국의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미술뿐만이 아니다. 매달 말 사색연희는 클래식과 재즈 애호가들이 모이는 작은 공연장이 된다. 식탁이 있던 자리에 첼로, 하프, 기타가 들어서고, 관객들은 음악과 함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짧은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도 펼쳐진다. 작곡을 전공한 윤 대표가 직접 섭외한 배우와 연주자들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