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뜨거운 5일'…오일머니 캐는 K스타트업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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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 한국 스타트업의 신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탈(脫)석유 정책을 추진하며 창업을 국가 차원의 과제로 설정한 중동 나라들이 많습니다. 최근 스타트업 행사 ‘BIBAN 2023’을 개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가 가장 적극적입니다. 한국 스타트업 13개사가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행사장으로 직접 날아가 ‘뜨거운 5일’을 보낸 이유입니다. 한경 긱스(Geeks)가 국내 언론사 최초로 사우디 중소기업청(몬샤아트)의 정식 초청을 받아 현장에 동행했습니다. “대형 국책 프로젝트에 ‘스치기만’ 해도 대박”이라며 열기를 불태운 한국 창업가들의 숨가쁜 일정을 전합니다.“혁신가를 키우는 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왕국과 전략적 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 중인 한국은 그 성공 사례입니다.”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지난 9일(현지시간)부터 13일까지 열린 중동 최대 스타트업 행사 ‘BIBAN 2023’에서 반다르 이브라함 산업자원부 장관은 연사로 나서 이같이 발표했습니다.
올해 BIBAN 2023에는 글로벌 550개 스타트업 및 기관, 14만5000명의 방문객이 찾았습니다. 사우디 정부가 벤처 창업을 지원하는 정부기관 몬샤아트를 설립한 것이 2016년입니다. 이듬해부터 시작된 행사로 사실 코로나19 기간 열리지 못한 점을 따지면 역사가 길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일 머니’를 향한 전세계 창업가들의 관심은 꾸준히 누적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 예상보다 4만 명이 더 올해 행사장을 찾았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브라함 장관이 한국을 언급한 것은 의미가 컸습니다. 실제로 최근 사우디는 한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몬샤아트는 자국 내 창업 지원과 해외 스타트업 유치를 통해 ‘탈(脫)석유’ 국가 수입을 6배 늘리겠다는 비전 2030 계획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 정부와 교류도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한국 최대 스타트업 축제 ‘컴업’에 칼리드 알 팔리 사우디아라비아 투자부 장관이 방문한 것에 이어, 올해 행사엔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임정욱 중기부 창업벤처혁신실장 등 정부 관계자들이 BIBAN을 찾았습니다. 다수의 국내 스타트업들이 ‘오일머니’를 유치할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것입니다.
"조단위 개발 프로젝트 선점"…현지 공략 '시동'
“대~한민국!(짝짝짝 짝짝)”중동 최대 스타트업 행사 ‘BIBAN 2023’의 마지막 날인 지난 13일(현지시간) 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국제컨벤션센터의 축구장 모양 무대에서 함성과 응원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글로벌 500개 스타트업 가운데 최우수 업체를 선발하는 이벤트(드레이퍼 알라인)에서 한국 스타트업 엔젤스윙과 오톰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면서입니다. 올해 참가한 13개 스타트업 중 대부분(10개)은 중기부와 동행해 부스를 꾸렸습니다. 행사가 열린 사우디 리야드 프론트컨벤션센터(RFECC) 중앙 입구(게이트 2)에서 동고동락한 이들은 마지막 날엔 ‘원 팀’이 되었습니다.박원녕 엔젤스윙 대표는 상금으로 50만달러(약 6억4600만원) 투자 유치가 확정되자 즉석에서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춤을 췄습니다. 드론으로 건설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는 엔젤스윙의 플랫폼은 이미 현지 기업인들 다수가 관심을 보인 상태였습니다. 행사 두 번째 날 현지 전통 복식인 흰색 ‘토브’를 걸치고 부스에 섰던 박 대표는 현장을 돌던 압둘라 알스와화 사우디 정보통신부 장관으로부터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연결해주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박 대표는 “전날 구매한 토브가 현지인들의 호의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이웅희 H2O호스피탈리티 대표는 한국 참가 기업 중 유일하게 발표 무대에 서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T)’에 대해 설파할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호텔에 디지털 시스템을 제공하는 H2O호스피탈리티는 지난 1월 사우디 법인을 냈습니다. 발표 직후 기자와 만난 그는 “5성급 호텔의 중심은 중동”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우디는 실제로 북서부 지역을 관광단지로 만드는 ‘아마알라’, 최고봉 산악지대를 개발하는 ‘수다’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총생산(GDP)의 10%를 관광 산업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호텔 건설은 필수입니다. 이 대표는 “아부다비 투자진흥청, 사우디 투자부(MISA)와 사업 협약을 추진 중”이라며 “이르면 6월부터 중동 시장에서 우리의 호텔 솔루션을 적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르면 이달 안으로 아랍에미리트(UAE)에도 지사를 설립할 예정입니다.
농업과 기술을 접목한 애그테크 분야를 공략하고 있는 한국 스타트업 넥스트온은 이달 리야드에 지사를 열었습니다. 발광다이오드(LED) 기반 ‘인도어 팜(실내 농장)’ 기술로 이미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6개국에 4억달러(약 530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도 따낸 곳입니다. 박성중 넥스트온 매니저는 “딸기 같은 상품성이 큰 작물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작물을 해당 지역에서 자급자족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어, 스마트 배양액 성분 조절 기능 등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 회사 역시 ‘레드시’ ‘키디야’와 같은 사우디 개발 프로젝트 참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 구매력 기대…바이오·보안 분야도 관심
“에브리베이비!” 행사장 한쪽, 녹색 잔디가 깔린 축구장 모양의 무대에선 의료 스타트업 디씨메디컬의 최다브리엘 대표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드레이퍼 알라딘은 최우수 3개 업체를 뽑기 이전에, 약 2% 내외 업체를 미리 추려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이 명단에 올랐을 때만큼은 그도 짜릿함을 맛봤습니다. 최 대표는 정확도를 90%까지 끌어올린 조산진단키트 ‘에브리베이비’를 개발해 데모데이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출산율이 높지만 조산 진단 체계가 미비한 사우디 시장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습니다.한국의 바이오 스타트업은 또 있었습니다. 신형 인공와우를 만드는 업체 토닥의 민규식 대표는 BIBAN의 또 다른 이벤트였던 ‘기업가정신 월드컵(EWC)’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현장을 찾았습니다. 사우디 방문은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이 대회의 2021년도 우승자 출신입니다. 연내 세계 최초 32채널(성능 지표) 양산형 인공와우의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까지 해외 방문객들과 교류했습니다. 바이오 업체가 중동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는 왕정 국가 특성상 보건 산업에서도 정부의 ‘구매력’이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휴대용 엑스레이 기기를 만드는 오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업체 측은 방사선량과 무게를 2㎏까지 줄여낸 오톰의 기기는 보건소 등 각종 국가 의료시설에도 쉽게 공급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요소도 기회입니다. 최근 사우디는 이란에 이어 시리아와도 관계를 복원하기로 합의했지만, 종파 문제로 인한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준호 오톰 대표는 “한국 국방부에도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며 “사우디 군에서도 제품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우디 정부 투자기관 RVC로부터 투자받은 보안기업 시큐레터도 비슷한 이유로 현장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레베카 황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실리콘밸리뱅크 몰락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각화의 중요성과 신흥시장 진출”이라며 “중동의 자본력은 생성 인공지능(AI), 콘텐츠, 커머스 등 여러 분야의 한국 스타트업에도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한 가지 더
“격주에 1회 만난다”…사우디와 한국 정부, 교류 늘린다“1~2년 안에 결과를 내기보다는 기초를 다지겠다는 마음입니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BIBAN 2023’ 현장에서 기자를 만나 “사우디는 스마트팜·콘텐츠·전자상거래 등 관심 분야가 넓고, 북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테스트베드 역할도 가능하다”며 국내 스타트업 진출을 지속 지원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왕정 국가인 사우디는 해외 개별 스타트업이 진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곳입니다. 그동안 해외 기업을 유치할 필요성이 적어 외국인 계좌 개설이나 비자 및 거주증(이까마) 발급, 사업자 등록 절차 등이 매우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현지 사람을 써도 사업 허가를 받는 데 6개월씩 걸렸다”는 게 창업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행사 기간 사우디 정부 측 인사 다수와 접촉한 이 장관은 “중국에만 집중하던 우리 기업에 수출 다변화 측변에서 중동과의 합은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역시도 “사막을 건너기 전에 친구가 될 사람을 찾는다는 사우디 속담을 접했다”며 “극적인 변화가 당장 나오긴 힘들지만, 주요 인사들과 정책 파트너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확실히 다졌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중기부 산하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은 행사 첫날인 지난 9일 사우디 투자부와 정보 교환, 리야드 글로벌 비즈니스센터(GBC) 설립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비자나 법인 설립도 지원을 추진합니다. 격주 단위로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토대는 다져진 셈입니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습니다. 사우디는 외국 법인에 현지인 의무고용 쿼터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비자 문제 역시도 추가적으로 교류를 늘려야 할 관계부처가 많은 상황입니다. 중기부는 우선 두 나라를 오가는 가교 역할을 할 사우디벤처캐피털(SVC)과의 공동펀드 계획을 구체화해 국내 스타트업을 도울 예정입니다. 청년 창업 교육도 함께하고, 양국 기업 및 사절단이 방문하면 협력 의제도 지속 발굴한다는 계획입니다.이 장관은 “사우디는 기업인 출신 각료들을 영입해 젊은 정부를 구성하고, 탈석유 이후 디지털 경제 준비에 대한 강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며 “사우디 시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까지 활용이 가능해 국내 스타트업이 분야 제한 없이 진출을 시도해볼 만하다”고 말했습니다.
리야드=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