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봄밤을 적신 '한국 시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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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봄’ 기간에 ‘한국 시의 밤’한국 시인 20여 명이 프랑스 최대 문학 행사인 ‘시인들의 봄’(Printemps des Poètes) 축제에 참여해 곳곳에서 한국 시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파리시테·엑스마르세유大서 낭송
“BTS 가사도 시”…대학생들 환호
한국 시인들 낭송 들으며 눈물도
한국시인협회(회장 유자효) 소속 시인들은 지난 21일 프랑스시인협회(회장 장 샤를 도르주)와 상호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시와 함께하는 한국·프랑스 우정의 밤’을 가진 데 이어 파리시테대학교와 프랑스 남부 엑스마르세유대학교 등에서 ‘한국 시의 밤’ 행사를 가졌다. 이는 양국 시인협회의 첫 공식 교류 행사로, 주제도 올해 프랑스의 ‘시인들의 봄’ 주제에 맞춰 ‘경계’(frontières)로 잡았다.지난 22일 파리시테대학교에서 열린 ‘시인들의 봄’ 행사에서는 한국 시인 5명과 이 대학 재학생 6명이 시낭송 릴레이를 펼쳤다. 진행은 이 대학 한국학과 김진옥 교수가 맡았다.
첫 순서로 이규형 시인의 시 ‘대화’를 1학년생 이지스 폴레즈가 한국어로 낭송한 뒤, 시인이 창작 배경을 설명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국어 낭송과 함께 프랑스어 자막이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창작 배경 설명은 동시통역으로 전달됐다.
프랑스 대학생들의 한국어 자작시 ‘뭉클’
이 같은 방식으로 고두현의 ‘몽파르나스 공원묘지’와 윤석산의 ‘북녘 길’(다비나 알렉상드린 낭송), 한영숙의 ‘50보 100보’, 동시영의 ‘세상 부스러기 조금 맛보다’(세지니 세샤 낭송)가 이어지고 학생들의 자작시 낭송이 시작됐다. 한국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한국어로 시를 쓰고 낭송했으며, 창작 의도를 설명할 때도 한국어를 구사했다.1학년인 루이 페냐르는 ‘숟가락인(人)’이라는 시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을 동서문화의 조합으로 절묘하게 표현해 감탄을 자아냈다.그는 ‘숟가락과 젓가락, 나이프와 포크/ ‘수저’와 ‘나이포’/ ‘수저’는 동이고 ‘나이포’는 서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저는 동과 서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포크와 젓가락 사이에/ 저는 숟가락인이 아닙니까?’라며 한글과 한자까지 아우르는 묘미를 선보였다.3학년 사미라 마냥 음벤이 낭송한 자작시 ‘영계의 경계’를 비롯해 토미 슈발리에의 ‘욕망의 경계’, 마리 샤렝의 ‘언어의 경계’, 플로라 엑스티의 ‘10월의 아침’, 솔랄 그뤼드의 ‘경계’도 놀라운 발상과 표현법을 보여줬다.이날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한양대 인문대학장은 ‘프랑스에서의 한국 문학’이라는 강연을 통해 “20세기에는 프랑스 문학이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제 한국 문학이 프랑스인의 가슴을 적시는 시대가 됐다”며 “양국 젊은이들이 손잡고 문학적 성과를 함께 넓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문명 속 시는 반도체 칩 같다”
한국 시인들은 24일 프랑스 남부 엑스마르세유대학교로 장소를 옮겨 ‘한국 시의 날’ 행사를 열었다. 이 대학 한국학전공 김혜경 교수가 진행했다.이날 행사에서 최동호 시인은 “방탄소년단(BTS)의 가사가 뛰어난 현대시의 표현이자 노래의 영혼인 것처럼 K팝 전체가 한국어로 구사된 시적 표현”이라며 “디지털 문명이 시와 노래를 하나로 만들었으니 시는 반도체의 칩과 같다”고 강조했다. 박수갈채와 함께 사인 요청이 쇄도했다.이 대학 한국학 전공 창설자이자 프랑스어판 한국문학 웹진 ‘글마당’ 창립자인 장클로드 드 크레센조는 “한국 시가 밀폐돼 있으면 안 되고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나라 시와 즐거이 충돌해야 한다”며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한국 시의 만남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이날 시낭송에는 가장 많은 시인이 참여했다. 최동호 시인의 ‘명검’을 시작으로 김추인(‘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이경(‘정사’), 권순자(‘천 개의 눈물’), 박이영(‘참새는 어디로 갈까’), 서정란(‘봄이 온다’), 석연경(‘나는 아침에게 젖을 물린다’), 유태승(‘어두워져야 빛나는 별처럼’), 임완숙(‘거울’), 장인무(‘달려왔습니다’), 조명(‘세족’), 이도훈(‘무늬들’), 김계영(‘아리랑 가락에 하나 되어’), 김향숙(‘마리오네트의 저녁’), 서승석(‘섬김’), 김재홍(‘무료 선생’) 시인의 낭송이 이어졌다.“오늘부터 시를 사랑하게 됐어요”
낭송 도중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한 학생은 “그동안 시에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오늘부터 시를 사랑하게 됐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이를 지켜본 이근배 시인은 “프랑스와 한국은 ‘시의 나라’라는 공통점을 지녔다”며 “두 나라 젊은이들이 세계적으로 시를 살리는 일에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23일에는 한국 시인들이 파리 6구에 있는 프랑스시인협회 사무실을 방문해 ‘매년 번역 시 교차 게재’ 등 실무 협약을 재확인하며 양국 협회의 첫 국제교류를 자축했다.유자효 한국시협회장은 “이번 행사가 성공하기까지 파리에 거주하는 조홍래 한국시협 국제 담당 자문위원 등의 도움이 아주 컸다”며 “앞으로 더 많은 교류 협력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최재철 주프랑스 대사도 21일 협약 체결식 축사에 이어 23일 양국 시인들을 대사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며 한·프랑스 시의 영토를 넓히는 데 힘을 보탰다.
파리=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