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위계로부터의 해방…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 회고전

아트선재센터 전시…공간 떠낸 '스키닝' 작업·'입고 움직일 수 있는 조각' 등
사회의 가부장제 구조와 위계로부터 해방을 추구했던 스위스의 아방가르드 작가 하이디 부허(1926∼1993)의 첫 아시아 회고전 '공간은 피막, 피부'가 28일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했다. 1971년에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됐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사회였던 스위스에서 자란 부허는 여성 예술가로서 이런 위계적인 가부장제 구조에 저항할 방법으로 '스키닝'(skinning)을 고안했다.

스키닝은 어떤 공간의 새로운 표면, 즉 '피부'(skin)를 만들고 이를 떼어내는 것이다.

공간의 벽에 부레풀을 섞은 거즈를 두르고 액상 라텍스를 부은 뒤 굳히고 떼어내면 공간의 손잡이나 창틀 등의 흔적이 천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부허는 '남자들의 공간'이었던 아버지의 서재와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집의 마룻바닥, 당시 여성만이 걸리는 질병으로 여겨졌던 '히스테리아' 전문이었던 정신과 의사 빈스방거의 진찰실 등 가부장적인 위계성이 내재한 공간들을 스키닝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스키닝은 부허가 추구한 '해방'의 방식이다.

딱딱하고 위계적인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불태우거나 파괴하는 대신 부드럽고 유동성 있고 변동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버리는 것(변신)으로 나름의 전복을 시도했다. 부허가 굳어진 라텍스를 바른 천을 힘겹게 떼어내는 행위 자체도 공간의 위계성을 벗겨낸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작가가 천을 떼어내는 모습은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전시에서는 스키닝 기법으로 제작한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 '바닥피부'(1980) 등 주요 스키닝 설치 작업 4점을 볼 수 있다. 이 중 '잠자리의 욕망(의상)'(1976)은 변태를 거쳐 허물을 벗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상징으로서 잠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패션과 직물을 공부했던 부허는 역시 예술가였던 남편과 함께 '입을 수 있는 조각'(wearable sculpture)을 공동 작업했고 이는 이후 '입고 움직이는 조각'으로 이어진다.

'바디쉘'·'바디래핑'(1972) 시리즈는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든 조각으로, 단단하고 고정적이라는 조각의 전통 개념에서 벗어나 몸의 움직임과 함께 유동적으로 변하는 새로운 조각 개념을 제시한다.

철이나 돌 같은 반영구적인 재료로 대규모 작품을 만드는 모더니즘 조각에 반기를 든 1960∼1970년대 페미니즘 조각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2년 두 아들과 함께 선보인 '바디래핑' 작품을 재현해 관람객들이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게 했다.

부허는 후기 작업에서 흐르는 물에 관심을 뒀다.

가둬둘 수 없는 흐르는 물의 속성은 부허가 평생 추구했던 해방의 주제와도 맞닿아있다.

주전자 밖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라텍스로 형상화한 설치 작품과 물을 주제로 한 수채화 작품 등이 전시된다.
전시에서는 이 밖에도 침대, 여성 속옷, 드레스 등 여성들의 가구와 사물들을 액상 라텍스에 담그고 자개 안료를 더해 부조로 제작한 '소프트 오브젝트'(부드러운 조각)와 실크 콜라주, 초기 드로잉, 영상 기록, 다큐멘터리 등 총 130여점을 선보인다.

부허는 사후에 더 주목받은 작가다.

별세 후 10년이 지난 2004년 스위스 취리히의 미그로스 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됐고 2021년 독일 뮌헨의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하우스데어쿤스트의 안드레 리소니 관장은 부허를 두고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로 평가하기도 했다고 아트선재센터는 전했다.

아트선재센터 1층에서는 부허 전시와 연계해 박론디, 우한나, 박보마 등 한국 30대 여성 작가 3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즐겁게! 기쁘게'전이 열린다. 전시는 6월25일까지. 유료 관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