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조삼모사의 정치경제학
입력
수정
지면A30
'아침 도토리 4개' 선택한 원숭이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너무 좋아해 집에서 수십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아꼈다. 원숭이들 역시 저공을 따랐고 사람과 원숭이 사이에 의사소통까지 가능해졌다.
미래가치 감소 생각하면 현명
양곡법 등 선심법안 폭주 정치권
票 위해 미래가치에 높은 '할인율'
엄격한 재정준칙 꼭 필요한 까닭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는 게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었다. 고민 끝에 저공은 원숭이의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머리를 썼다. “앞으로는 너희들에게 나눠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펄쩍 뛰며 “아침에 하나 덜 먹으면 배가 고프다”며 화를 냈다. 그러자 저공이 슬쩍 말을 바꿨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는 건 어떠냐?” 그 말에 원숭이들은 모두 좋다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중국의 고전 <열자>와 <장자>에 나오는 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는 당장 눈앞의 차이만 따지고 그 결과가 같음은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한다.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희롱함을 일컫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도토리의 총합은 일곱 개로 동일하기 때문에 분배 방식과 관계없이 가치가 동일하다는 전제에 서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시간에 따른 위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공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저녁이 됐을 때 먹이가 부족할 수 있다. 따라서 원숭이들은 가능하면 먼저 많이 받는 선택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도토리 한 개의 가치는 아침과 저녁이 결코 같지 않다. 불확실성을 감안한 ‘할인율’이 크면 클수록 도토리 한 개의 미래 가치는 줄어든다. 아침에 네 개를 선택한 원숭이들은 어리석기는커녕 지극히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지난 23일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을 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여당의 반대에도 과반 의석을 이용해 입법을 강행했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 생산량이 평년보다 3~5% 증가하거나 쌀값이 평년보다 5~8% 떨어지는 경우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매입하는 내용이다. 지금도 정부는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초과 생산된 쌀을 사서 창고에 넣는 조치(시장 격리)를 하고 있지만 이를 법으로 못 박아 정부 재량권을 박탈하자는 것이다.정부는 양곡법 개정안이 만성적인 쌀 공급 초과 현상을 심화시키고 의무 매입에 따라 막대한 재정 지출을 야기할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의무 매입이 도입되면 공급 초과가 심화돼 2030년까지 연평균 1조원의 세금이 들어가고, 2030년에는 1조4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막대한 재정 지출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농민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예측에 따르면 양곡법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쌀값은 더 떨어진다. 올 수확기 기준 18만원가량인 80㎏당 가격이 2030년에는 17만3000원 정도가 된다. 초과 생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농민단체는 양곡법 개정을 지지해 왔다. 농민들이 어리석어서일까? 아니다. 이들은 미래의 이득만이 아니라 손실도 ‘할인’하고 있다. 일단 챙길 건 챙기고 뒷일은 그때 가서 보자는 식이다.이를 방조하는 것이 정치권이다. 정당과 정치인이 미래 가치에 적용하는 할인율은 매우 높다. 다음 선거에서 표만 된다면 미래의 재정 부담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가 무수한 선심성 법안이다. 이미 국회를 통과한 가덕도신공항, 한전공대, 장병우대금리, 아동수당 확대, 양곡관리 외에도 민주당은 문재인 케어(연간 5조원), 기초연금 확대(연간 10조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모두가 단기적으로는 환영받지만 장기적으론 문제를 악화시킬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법안이다. 반면 장기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당장에 인기 없는 사안은 미루고 미룬다. 대표적인 예가 연금개혁이다.
이처럼 미래 가치와 미래 비용에 높은 할인율을 적용하는 특수이익과 정치권이 합작해 미래의 재정 파탄을 만들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가 재정을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축소하는 수밖에 없다. 엄격한 재정준칙이 요구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