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美 아편에 병들었을 때도 우호적이던 中…사이 틀어진 건 조선 탓?

(22) 미·중 갈등의 시작

100년 가까이 미국 '연기산업'에
희생 당하고도 호감 보였던 중국

조미수호조약서 조선지위 두고 대립
'속방'의견 무시 당해 자존심 구긴 후
6·25전쟁터서 만나 사이 최악으로

소련 고립 시키려 다시 친선 맺지만
최근 패권전쟁 겪으며 재점화
원래 고생하는 놈 따로 있고 돈 챙기는 분 따로 있는 법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편전쟁에 매달리는 동안 미국은 둘의 뒤를 따라다니며 짭짤하게 이익을 챙긴다. 청나라에 아편을 팔아먹은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외조부가 중국에서 사업을 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사업이란 게 아편이었다. 인구 대국답게 청나라의 아편 소비량은 상상 초월이다. 1869년 청나라의 아편 수입 총액이 6195만냥이었다. 많다는 건 느낌상으로도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일까. 1884년 청나라는 독일에 철갑함선 두 척을 주문한다. 운송비 포함 339만냥이었으니 계산해보면 1869년 중국인들은 철갑함선 18척을 아편으로 피워 날린 셈이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1894년까지 25년 치를 모두 더하면 450척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하나마나 한 가정이지만 이 함선이 모두 실현됐다면 중국은 청일전쟁의 승리는 물론이고 역진해서 유럽도 정복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담배 애호는 유난하다(현재의 전자담배를 발명한 것도 중국).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은 연기 뿜는 맛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미국은 자동 담배 생산 기계를 발명해 이번에는 중국에 담배를 팔아먹는다. 엄청난 광고 공세로 1902년 12억5000만 개비였던 판매량은 10년 후 120억 개비로 증가한다.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미국은 ‘연기 산업’으로 중국을 정말 알뜰하게 빨아먹었다.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 중국인은 미국인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일단 영국과 프랑스처럼 살기등등하지 않았고(2차 아편전쟁 당시 파머스턴 영국 총리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를 몰아내겠다고 공언했다) 온건한 문호 개방 정책을 펼쳤으며 선교사들은 교육, 위생 사업으로 호감을 줬다. 두 나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조선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국 미술가 니경예의 작품이다. 브리티시 아메리칸 담배 회사의 광고 부서에서 일했던 그는 하데멘을 비롯해 수많은 담배 광고를 디자인했다. 니경예는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세련된 모던 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중국 여성들은 너도나도 매력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다. 참 이상한 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인 중 영어가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청나라로 유학 간 학생 둘이 이제 막 영어를 배우고 있었을 뿐이다.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수로 조약? 간단하다. 조선은 완전히 배제된 채 협상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이뤄졌다. 미국 측 대표 슈펠트와 이홍장은 조선의 지위를 놓고 각을 세운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하자는 미국과 중국의 속방으로 하자는 중국의 의견 대립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를 삭제하는 대신 조약 체결 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청나라 간 종속 관계를 밝히는 타협안이 만들어진다. 1887년 조선은 전권 대표를 미국에 파견한다. 12월 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위시해 많은 고급 관리를 만난다. 의전 때마다 박정양은 독립적이고 자주권을 가진 나라 대표처럼 행동했고 이는 이홍장을 격분시킨다. 미국 역시 조선을 국제법상 평등한 독립국으로 대우했고 중국이 주장하는 종속국의 정치적 의미를 ‘일부러’ 무시했다. 중국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1차 미·중 갈등이라고 본다.

2차 미·중 갈등은 6·25전쟁이다.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스탈린은 1950년 4월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면서 동양 문제는 마오쩌둥의 이해가 높으니 그와 상의하라고 권고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을 자신이 차지하고 실패하면 책임을 김일성과 중국에 돌리려는 간악한 술책이었다. 여기에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이라는 오판으로 마오쩌둥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중국은 졸지에 전쟁 당사자가 된다. 2년10개월이나 전투를 벌인 미국과 중국은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게 최악으로 헤어진다. 미국과 중국이 다시 만난 것은 1972년이다.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은 미·중 데탕트를 열었고 1979년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두 나라의 우호는 절정을 맞는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3차 미·중 갈등이다.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는 후진타오의 화평굴기(和平起·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일어선다)로 진화하더니 시진핑의 대국굴기(大國堀起·대국으로 우뚝 선다)로 완성된다. 복잡하게 말해 죄송하다. 쉽게 말해 더 이상 미국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얘기다. 제국(帝國)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에너지, 무역 루트, 그리고 자국 화폐의 기축통화다. 역으로 말하면 이 중 하나만 잃어도 제국의 지위는 흔들린다. 자원 관리와 무역 루트의 방어에서 미국은 중국을 제압했다. 남은 것은 기축통화인데 그런 면에서 얼마 전 ‘공포의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의 발언은 다소 당혹스럽다. 그는 중국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세계 통화 체제가 달러와 위안화 두 종류로 양분된다는 얘기인데 그걸 미국이 보고만 있을까. 맥락 없는 친중파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중국을 G2(주요 2개국)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는 마당에야.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