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공영방송 문제를 푸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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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환경 변화 제대로 이해 못해지난 3월 3일은 공영방송 50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국민 모두 힘들던 1970년대에 공영방송의 필요성은 명백했고 공헌한 바도 명확하다. 하지만 영욕의 50년 세월을 지내온 지금은 재원 확보, 사장 선임, 민영화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관계자마다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 도출은 요원해 보인다. 문제의 분명함만큼이나 해법을 찾지 못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이 지면에서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선결해야 하는 두 가지 이슈를 제시하고자 한다.
공영 유지할지, 어떤 기능 맡을지
먼저 합의 후 재원 조달 논의해야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첫 번째, 매체 환경 변화에 관한 오해. 공영방송 문제가 매체 환경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문제는 매체 환경 변화의 속도와 방향성이 지니는 함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지금 진행되는 매체 환경 변화는 케이블TV와 인터넷TV(IPTV), 종편 4사가 생기면서 발생한 방송시장 내부의 점진적 변화와는 차원이 다르다.전화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전보라는 매체는 공존했다. 휴대폰이 손안의 전화기를 구현한 지금은 어떠한가.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라디오는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현재 매체 환경 변화는 이런 차원의 패러다임 변화를 의미한다. 새로 등장한 매체가 기존 매체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단적으로, 주류 매체가 바뀌었다.
주류 매체의 변화는 콘텐츠 시장이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변했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새로운 주류 매체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원하는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구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영방송은 우리 가게가 50년 전통이라며 호객하고 있다. 더 맛있고 좋은 재료를 쓰는 가게는 많다. 그래서 내 돈 내고는 그 집 음식은 사 먹지 않겠다는 소비자에게, 다른 가게처럼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우선 우리 음식을 좀 팔아달라고 응석까지 부린다. 소비자는 이용에 대한 욕구가 있어야 소비하고, 그 결과 느끼는 만족도에 따라 반복 소비를 한다.
현재의 공영방송 이슈가 풀릴 수 없는 이유는 이용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소비자에게 측은지심과 애정을 유발하려는 공급자의 설득이 비논리이기 때문이다.두 번째, 문제를 푸는 순서의 오류. 설계도는 집을 지을 지형에 맞춰서 그려지는 것이고, 설계도에 따라 재원 규모가 결정된다. 매체 환경 변화로 방송시장 지형이 바뀌었다. 하지만 공영방송은 변화한 지형에 눈을 감고 현재의 재원 구조로는 현상 유지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음식의 질을 비판하며 가게를 나가는 소비자에게, 공급자는 더 좋은 재료를 쓸 수 있게 음식 가격을 좀 더 내달라고 호소한다. 1980년에 지은 전통 있는 가게지만, 이제는 대박집 옆 가게일 뿐인데.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좋은 재료로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가게는 많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공영방송의 기능에 관해 소비자의 합의 도출이 선행돼야 한다. 현재 매체 환경에서 공영방송을 유지할 것인지, 유지한다면 어떤 기능을 맡길 것인지 선제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다음에 설계도에 해당하는 구조와 규모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그에 맞춰 재원 조달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순리다.
지금은 공영방송의 기능과 재원 문제가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문제를 푸는 순서가 중요하다. 문제를 풀 시간도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