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ESG 공시 포비아

[한경ESG] 편집장 레터

요즘 기업 ESG 담당자를 만나면 공시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곤 합니다. ESG 공시의무화가 임박했다는 신호를 감지하지만, 대응할 엄두가 안 난다고 말합니다. 유럽은 2024년 의무 공시가 시작되고, 미국도 6월에는 이를 확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글로벌 공시 표준을 만드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역시 6월에 최종안을 발표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선 ‘6월 위기설’까지 나옵니다.물론 위기설은 과장입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대응 속도를 높이려는 선의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지나친 위기감은 오히려 대응 의지를 꺾을 수 있습니다. 현재 논의되는 기준이 높아 보이는 건 분명하지만 설령 그대로 통과해도 당장 모든 기준이, 모든 기업에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ISSB 표준 역시 각 나라별로 채택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많은 기업이 우려하는 스코프 3 배출량도 전 세계 글로벌 기업 중 이를 완벽하게 측정하고 있는 곳은 아직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다는 데 진짜 고민이 있습니다. 의무화 여부와 상관없이 글로벌 프레임에 맞춰 공시하는 곳이 늘면 비교 대상이 됩니다. 자칫 ESG에 관심 없는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많은 글로벌 어젠다가 처음에 잘하는 기업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못하는 기업에 대한 채찍이 되곤 합니다.

ESG 공시의무화는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정해진 미래입니다. 아직은 우리 기업이 실제로 따라야 할 기준이 확정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가이드라인부터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TCFD는 현재 논의되는 3대 글로벌 공시 표준의 원조 격입니다. 3대 표준이 모두 TCFD를 기본 틀로 삼거나 이를 대폭 반영하고 있습니다. TCFD에 적응하면 다른 표준도 큰 어려움 없이 도입할 수 있습니다.TCFD는 기업이 기후변화로 겪게 될 리스크와 기회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를 위해 기후 시나리오 분석도 요구합니다. 기업에 돈을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정보입니다. 이는 TCFD가 금융계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접근입니다. TCFD 이전에는 글로벌 리포팅 이니셔티브(GRI)가 있습니다. GRI는 미국 환경 NGO 세레스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설립한 곳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GRI 표준이 자신의 관심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낀 투자자들이 TCFD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TCFD에서 기업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기후 시나리오 분석입니다. 미래에 발생할 기후변화를 가정해 중·장기적 예상 위험과 기회를 특정해내는 것이 결코 간단한 작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작이 중요합니다. 어떤 공시 표준이 채택되든 시나리오 분석은 필수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석은 공시 때문이 아니더라도 기후변화 시대를 버텨내야 하는 기업으로선 반드시 해야 할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승규 <한경ESG> 편집장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