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고산자 김정호의 측량법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낳은 나일강은 해마다 봄이면 범람했다.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계절성 폭우가 원인이었다. 대홍수는 땅을 비옥하게 했지만 토지의 경계를 파괴해 땅주인 간 잦은 다툼을 유발했다. 그래서 토지가 유실되면 땅주인은 곧바로 국가에 신고했고, 세소스토레스 왕은 유실 토지 면적을 측량해 세금을 감면해줬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명의 형성에서 측량과 수학의 발달은 필수적이다. 고대부터 등장한 측량기술과 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였다. 봉건제 붕괴 후 땅의 소유 개념이 커진 데다 항해술 발달 등으로 지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스트롤라베, 사분의, 세오돌라이트, 트랜시트, 콤파스 등 다양한 측량기기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18세기 이후에는 삼각측량기술이 발전해 정확도가 높아졌다.일본에서 환수해 지난 30일 공개된 고산자 김정호(1804~1866·추정)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가필본을 보면서 그 정교함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수평각 및 고저각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트랜시트나 항공측량, 전자파 측정도 없던 때에 어떻게 현대식 지도와 별 차이 없는 땅의 형태를 그려냈을까. 우리나라 지도 제작 수준이 크게 향상된 건 조선시대부터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나 막대기로 거리를 재는 척측법(尺測法), 발걸음 수로 재는 보측법(步測法), 새끼줄이나 노끈·먹줄 등으로 재는 승량지법(繩量之法)을 주로 사용했다.

세종 때 장영실이 중국에서 배워 개량한 기리고차(記里鼓車)는 바퀴와 맞물린 톱니바퀴를 통해 거리를 측정하는 일종의 미터기였다. 톱니바퀴와 연결된 종과 북이 일정한 거리마다 울리는 수로 거리를 측정해 정확도를 높였다. 실학파 지리학자 정상기(1678~1752)가 100리를 1척으로 표기한 축적법 백리척(百里尺)도 지도 제작 수준을 한층 높였다. 고산자는 지도 제작을 위해 전국을 답사하고 당대의 모든 자료를 참고했으며, 전통적인 기법은 물론 백리척, 방안도법, 경위도법 등 최신 기법을 집대성해 대동여지도라는 ‘조선판 빅데이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