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린다던 지역화폐…명품·담배 매장만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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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400억 상품권 발행서울 제기동에 사는 이모씨(27)는 봄옷을 사러 지난달 31일 이태원을 찾았다. 최근 구매한 이태원 상권회복 상품권으로 서울 한남동의 고가 의류 매장에서 옷을 사기 위해서다. 이씨가 구매한 재킷과 티셔츠, 바지 등의 가격은 총 80만원이나 실제로 쓴 돈은 70만원이 되지 않았다. 20% 할인된 가격에 구매한 이태원 상품권으로 결제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번이 ‘할인 찬스’라고 생각해 평소 봐둔 브랜드의 제품을 샀다”며 “이태원 상품권으로 땡잡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최대 20% 할인에 수요 몰려
직접 피해 입은 소상공인보다
패션 매장·편의점에 쏠림 현상
"1회 10만원 제한 등 개선 필요"
이태원 참사 이후 침체한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발행한 이태원 상권회복 상품권이 엉뚱한 데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품권을 구매한 사람들이 손님이 끊긴 참사 현장 근처의 가게를 찾는 대신 고급 의류 매장에서 옷을 사거나 담배를 사는 데 쓰는 것이다.2일 용산구에 따르면 이태원 상품권은 지난해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침체한 이태원 상권을 살리기 위해 서울 용산구가 발행한 지역화폐다. 올 1월 100억원 규모로 1차 발행된 뒤 3월에는 300억원 규모가 발행됐다. 소비 촉진을 위해 할인율도 1차 10%에서 2차 발행 땐 20%로 늘렸다.
이태원 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이태원 1동과 2동, 한남동, 보광동, 서빙고동, 용산2가동 등 용산구 6개 동의 서울사랑상품권 가맹점이다. 이태원 참사와 관계없는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보니 이태원 상품권이 있는 소비자들은 사고 현장 근처의 가게보다 가격대가 높은 브랜드 매장을 찾는 사례가 많다. 할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이태원 상품권은 소규모 고급 의류매장은 물론 나이키 등 브랜드 의류매장에서도 쓸 수 있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엔 “이태원 상품권으로 쇼핑 질렀다”는 후기가 잇따른다.
정작 이태원 참사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참사 현장 인근의 가게들은 소비자들의 관심 밖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 근처의 세계음식거리에서 7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씨(42)는 “평소 이태원에 올 일이 없는 고객들이 상품권이 ‘20% 할인 기회’라고 생각해 음식보단 옷처럼 가격대가 높은 제품에 많이 쓰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흡연자들이 ‘면세효과’를 누리는 데 상품권이 쓰이기도 한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구역 바로 옆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모씨(51)는 “이곳 편의점에선 이태원 상품권을 사용하는 사람 10명 중 7명이 담배를 사 간다”며 “담배를 한 번에 한 보루씩 사 가는 사람도 종종 있다”고 했다.
이태원 상품권 문제는 지역화폐의 본질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용처를 좁게 한정하면 상품권으로서의 가치가 없고, 반대로 넓히면 특정 업종에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종욱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1회 사용 한도를 10만원으로 제한하는 등 지역화폐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광식/최해련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