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발굴 50년] ① '연습'으로 발굴한 155호 고분…1천500년 전 신라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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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시작한 천마총 발굴 조사, 올해 반세기 맞아…'천마도' 등 유물 대거 출토
실측 본격 도입·조사 보고서도 체계화…"문화재 복원·정비·활용의 출발점" [※ 편집자 주 = 신라 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경주 대릉원 일원에서 잘 알려진 무덤 중 하나가 바로 천마총(天馬塚)입니다.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경험을 쌓고자 시작한 조사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를 비롯해 금관, 금 허리띠 등 1만1천5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오는 6일 천마총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 50년이 됩니다.
연합뉴스는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천마총 발굴 반세기를 맞아 그 의미를 되짚고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단원의 소회, 특별전시 계획 등을 다룬 기사 3꼭지를 송고합니다. ]
"오늘은 날씨도 청명했지만, 아침부터 현장은 다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1974년 발행된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의 발굴 일지는 1973년 8월 22일을 이렇게 전한다. 그해 4월부터 시작한 발굴조사가 한창이던 그날, 조사단원이 장니(障泥·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으로 말다래라 함)를 들어내자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천마'가 나타났다. 조심스레 주변을 정리하자 나온 그림, 신라 회화로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급 무덤은 이듬해' 천마총'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유적 발굴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된 천마총 발굴은 이후 문화유산 발굴 조사와 복원·정비 사업의 기준점이자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 당시 대통령도 찾은 발굴 현장…국보급 유물 1만1천526점 쏟아져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우리 대표 문화유산인 천마총이 올해로 발굴 50년을 맞는다. 천마총은 1971년 청와대 주관으로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 4월 6일 발굴을 시작했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이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을 조직해 시행한 국가 주도의 첫 번째 '기획 발굴' 사례이다.
그러나 당초 정부가 고려한 발굴 대상은 천마총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가 마련한 종합계획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98호분 즉, 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이를 복원해 내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는 그 정도로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규모도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발굴조사를 해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좀 작은 고분'을 선택한 곳이 바로 천마총이었다.
일종의 '시험 발굴'인 셈이다.
김정기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단장으로 꾸린 조사단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간단한 위령제를 올리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12월까지 약 8개월간 신라 금관을 비롯해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관리가 쓰던 모자), 금제 허리띠, 팔찌, 유리잔 등 1만1천526점(보고서 기준)의 유물을 찾아냈다.
주요 유물이 나올 때마다 언론이 앞다퉈 소식을 전했고, 주요 외신은 '한국 고고학 발굴의 큰 사건'이라며 주목하기도 했다.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주요 유물 공개 설명회가 열릴 정도였다.
7월 3일에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 관심이 쏠렸다.
국가 원수가 발굴 현장을 찾은 첫 사례로, 당시 그는 현장을 둘러보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조사가 모두 끝난 건 12월 4일. 조사단원을 비롯해 총 3천451명이 투입돼 이뤄낸 작업이었다.
◇ 고고학에 획기적 변화 이끈 천마총 발굴…최초로 내부 공개해 의미
천마총 발굴은 신라 고분은 물론,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종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실측'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천마총이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실제로 천마총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보고서에 각종 실측 자료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서 해발 고도가 같은 지점을 연결한 등고선(等高線)으로 표시되며, 각종 실측 도면도 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발굴 이듬해인 1974년 11월 47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펴낸 점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기존에는 고분을 발굴했다 하면 유물을 꺼내는 게 다였지만 구조나 축조 기법까지 다 조사한 계기가 천마총 발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 고고학이 체계화되는 기점도 천마총 발굴"이라며 "유적을 구간별로 나눠 (측량하고) 차례로 발굴하는 기법도 천마총 이후 일상화됐다.
학문적 진일보에도 크나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당시 기술의 한계를 보완한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보고서에 남은 사진에는 고분 능선을 따라 반으로 자른 드럼통이 길게 연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사를 하면서 제거한 토양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장치로, 고(故) 김정기 박사가 직접 고안했다고 한다. 발굴 현장에서 실측을 도맡았던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은 "당시 흙 나르는 기계가 없어서 흙을 퍼내 (드럼통으로 된) 관로로 보냈다"며 "3차원(3D) 스캔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회상했다.
천마총은 내부를 전시관으로 꾸며 국민들에게 공개한 첫 시설로도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은 천마총 발굴 50년 기념 공식 누리집에서 "1976년 복원과 정비를 거쳐 개방한 천마총 공개시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분 공개시설로, 문화재 복원·정비·활용 사업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학계 전문가들은 출토된 황금 유물이나 무덤 크기 등을 고려할 때 왕릉급 무덤일 것이라 추정한다. 천마총 내부 전시관에서는 '무덤에 묻힌 사람은 황금으로 치장한 고대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보인다'며 왕이나 왕에 준하는 인물로 설명했으나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실측 본격 도입·조사 보고서도 체계화…"문화재 복원·정비·활용의 출발점" [※ 편집자 주 = 신라 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경주 대릉원 일원에서 잘 알려진 무덤 중 하나가 바로 천마총(天馬塚)입니다.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경험을 쌓고자 시작한 조사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를 비롯해 금관, 금 허리띠 등 1만1천5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오는 6일 천마총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 50년이 됩니다.
연합뉴스는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천마총 발굴 반세기를 맞아 그 의미를 되짚고 당시 발굴에 참여한 조사단원의 소회, 특별전시 계획 등을 다룬 기사 3꼭지를 송고합니다. ]
"오늘은 날씨도 청명했지만, 아침부터 현장은 다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1974년 발행된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 중)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의 발굴 일지는 1973년 8월 22일을 이렇게 전한다. 그해 4월부터 시작한 발굴조사가 한창이던 그날, 조사단원이 장니(障泥·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으로 말다래라 함)를 들어내자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천마'가 나타났다. 조심스레 주변을 정리하자 나온 그림, 신라 회화로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급 무덤은 이듬해' 천마총'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유적 발굴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된 천마총 발굴은 이후 문화유산 발굴 조사와 복원·정비 사업의 기준점이자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 당시 대통령도 찾은 발굴 현장…국보급 유물 1만1천526점 쏟아져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우리 대표 문화유산인 천마총이 올해로 발굴 50년을 맞는다. 천마총은 1971년 청와대 주관으로 수립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 4월 6일 발굴을 시작했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이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을 조직해 시행한 국가 주도의 첫 번째 '기획 발굴' 사례이다.
그러나 당초 정부가 고려한 발굴 대상은 천마총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가 마련한 종합계획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98호분 즉, 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이를 복원해 내부를 관광객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는 그 정도로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규모도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발굴조사를 해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좀 작은 고분'을 선택한 곳이 바로 천마총이었다.
일종의 '시험 발굴'인 셈이다.
김정기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단장으로 꾸린 조사단의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간단한 위령제를 올리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12월까지 약 8개월간 신라 금관을 비롯해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관리가 쓰던 모자), 금제 허리띠, 팔찌, 유리잔 등 1만1천526점(보고서 기준)의 유물을 찾아냈다.
주요 유물이 나올 때마다 언론이 앞다퉈 소식을 전했고, 주요 외신은 '한국 고고학 발굴의 큰 사건'이라며 주목하기도 했다.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주요 유물 공개 설명회가 열릴 정도였다.
7월 3일에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 관심이 쏠렸다.
국가 원수가 발굴 현장을 찾은 첫 사례로, 당시 그는 현장을 둘러보며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발굴 조사가 모두 끝난 건 12월 4일. 조사단원을 비롯해 총 3천451명이 투입돼 이뤄낸 작업이었다.
◇ 고고학에 획기적 변화 이끈 천마총 발굴…최초로 내부 공개해 의미
천마총 발굴은 신라 고분은 물론, 우리 문화유산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종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실측'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천마총이라는 게 학계 중론이다.
실제로 천마총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보고서에 각종 실측 자료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서 해발 고도가 같은 지점을 연결한 등고선(等高線)으로 표시되며, 각종 실측 도면도 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발굴 이듬해인 1974년 11월 47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펴낸 점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기존에는 고분을 발굴했다 하면 유물을 꺼내는 게 다였지만 구조나 축조 기법까지 다 조사한 계기가 천마총 발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 고고학이 체계화되는 기점도 천마총 발굴"이라며 "유적을 구간별로 나눠 (측량하고) 차례로 발굴하는 기법도 천마총 이후 일상화됐다.
학문적 진일보에도 크나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당시 기술의 한계를 보완한 아이디어도 눈에 띈다.
보고서에 남은 사진에는 고분 능선을 따라 반으로 자른 드럼통이 길게 연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사를 하면서 제거한 토양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장치로, 고(故) 김정기 박사가 직접 고안했다고 한다. 발굴 현장에서 실측을 도맡았던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은 "당시 흙 나르는 기계가 없어서 흙을 퍼내 (드럼통으로 된) 관로로 보냈다"며 "3차원(3D) 스캔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회상했다.
천마총은 내부를 전시관으로 꾸며 국민들에게 공개한 첫 시설로도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은 천마총 발굴 50년 기념 공식 누리집에서 "1976년 복원과 정비를 거쳐 개방한 천마총 공개시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분 공개시설로, 문화재 복원·정비·활용 사업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일까.
학계 전문가들은 출토된 황금 유물이나 무덤 크기 등을 고려할 때 왕릉급 무덤일 것이라 추정한다. 천마총 내부 전시관에서는 '무덤에 묻힌 사람은 황금으로 치장한 고대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보인다'며 왕이나 왕에 준하는 인물로 설명했으나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