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의 시각] 근로시간 논란이 남긴 것들

백승현 경제부 차장·좋은일터연구소장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할많하않(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근로시간제도 개편을 놓고 뭇매를 맞고 있는 고용노동부 공무원들이 요즘 자주 하는 말이다. 누가 들을세라 큰소리로는 못 하고 한숨 속에 담아 내뱉는 푸념이다. “지난해 기말고사 때는 답을 잘 썼다고 칭찬하더니 불과 몇 달 만에 답안지가 엉망이었다며 다시 써오라며 혼내고 있다”는 불만도 있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고용부가 입법 예고한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해 “입법예고 기간에 표출된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세대의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법안 내용과 대국민 소통에 관해 보완할 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비상경제장관회의를 거쳐 만든 확정안을 입법 예고한 지 8일 만의 일이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고용부의 정책 발표 직후 대통령이 곧바로 뒤집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24일 출근길에서 전날 이정식 고용부 장관의 ‘주 최대 52시간 근로시간 개편’ 발표에 대해 “아직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다”라는 ‘뜨악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고용부에서 발표한 게 아니고 부총리가 고용부에다가 아마 민간연구회라든가 이런 분들의 조언을 받아 노동시장 유연성에 대해 좀 검토해보라고 이야기한 사안”이라고도 했다. 고용부 공무원들은 이날 사건을 ‘6·24 사태’라고 부른다.

물론 대통령만 탓할 일도 아니다. 고용부는 전문가로 구성된 미래노동시장연구회(미노연)의 권고문을 토대로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고용부는 당초 일부 언론이 장시간 근로의 부작용을 우려하자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극단적인 프레임’이라고 강변해왔다. 그러더니 지난달 발표에서는 근로일간 11시간 휴식을 전제로 한 ‘주 69시간’과 근로일간 휴식 시간 규정이 없는 ‘주 64시간’ 중 선택할 수 있다는 옵션을 버젓이 명시했다. 뿐만 아니다. 이번 근로시간 개편 논란의 핵심인 “있는 연차도 다 못 쓰는데 장기휴가가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우려에는 이렇다 할 보장 장치에 대한 신뢰를 주기보다는 ‘제주 한 달 살기’만 강조한 것도 고용부다. 명백한 과정 관리 미숙이다.

노동개혁委 '복지부동' 모드로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용산의 호통에 고용부 공무원들은 바짝 엎드렸다. 눈치만 보는 건 공무원 조직뿐만이 아니다. 근로시간제 개편안은 미노연의 작품이었다. 노동 개혁과 관련해 정부가 운영하는 전문가위원회는 상생임금위원회, 이중구조개선위원회, 노동관행개선자문단 등 4개다. 모두 신속한 논의를 거쳐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방침이지만 이번 사태로 각 위원회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고 있다. 첫 번째 전문가 그룹의 결과물에 대통령이 사실상 ‘비토’를 놓으면서 다른 위원회에도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후문이다.

근로시간 개편은 윤석열 정부의 3대(노동·교육·연금) 개혁 중 1호 과제였던 노동 개혁, 그중에서도 첫 번째 세부 과제였다. 노동 개혁 과제로는 너무 지엽적이지 않으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정부는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전문가들을 독려해왔다. 그랬던 개혁 과제가 노동계의 반발도 아닌, 정부 내 엇박자로 좌초 위기를 맞았다. 이런 식이라면 진짜 노동 개혁은 해볼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