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한전채 리스크'…회사채 발행 앞둔 기업 자금조달 막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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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담 커진 한국전력▶마켓인사이트 4월 5일 오후 4시48분 “글로벌 채권시장 불안정성이 큰 상황에서 ‘한전채 폭탄’마저 터지면 회사채시장 투자심리가 크게 위축될 수 있습니다.”(한 대형 증권사 회사채 발행 담당자)한국전력 회사채가 채권시장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구축효과’가 다시 채권시장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으로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한전채 발행 물량마저 급증하면서 비우량 기업들의 자금 조달에 비상등이 켜졌다는 분석이다.
올들어 채권 8.5兆 발행
전기료 못올리자, 채권 의존 심화
회사채 외면땐 자금조달 '직격탄'
○적자로 한전채 발행 급증
5일 한국예탁결제원과 삼성증권 등에 따르면 올해 한전채 발행액은 8조5400억원에 달한다. 1월 3조2100억원, 2월 2조7100억원, 3월 2조900억원, 4월 5300억원 규모다. 이 추세라면 이달 10조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한전채 발행 증가는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전기를 팔면서 한전의 적자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문제는 지난달 말 전기요금 인상이 잠정 보류됐다는 점이다. 올해 적자 규모가 더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은 전기요금 인상 보류를 반영해 올해 한전 영업손실 전망치를 기존 8조6000억원에서 12조6000억원으로 높였다.그만큼 한전의 채권시장 의존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은 채권 발행을 제외하면 운영자금 마련을 위한 별다른 자금 조달 통로가 없어서다. 김명실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면 한전채 발행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전기요금을 30~40%가량 올려야 한전채 발행 조절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채 발행량 증가는 한전의 자금 조달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전채 발행 금리는 올해 1월까지 민간 채권평가기관이 평가한 금리 평균치(민평금리)보다 낮았다. 하지만 지난달부터는 민평금리보다 0.1%포인트 안팎 높은 금리에 발행되고 있다.
○일반 회사채 미매각 급증하나
한전채 발행 증가는 회사채시장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전채는 레고랜드 사태 등과 함께 지난해 하반기 채권시장 경색을 초래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한전채 발행액은 37조2000억원에 달했다. 국내 회사채 발행액(76조8000억원)의 45.6% 수준이다. 당시 AAA급 신용도를 갖춘 한전채가 시중 자금을 대거 흡수하면서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가 외면받는 등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지적이다.회사채시장에선 한전채발 구축효과가 올해도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2분기 들어 회사채시장은 우량채로 자금이 몰리는 ‘옥석 가리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글로벌 채권시장 불안전성이 커지면서 안전자산으로 자금이 쏠린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전채 발행마저 늘어나면 신용등급 A급 이하 비우량채 매수 수요는 더 위축될 것이란 분석이 많다.
A급 이하 기업들은 회사채시장에서 ‘쓴맛’을 보고 있다. 신세계건설(A)은 건설업 부실 우려로 지난달 28일 진행된 회사채 800억원어치 수요예측에서 100억원의 주문을 받는 데 그쳤다. GS엔텍은 모회사 GS글로벌의 지급보증으로 A급 회사채로 매겨졌지만 미매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달 회사채 발행을 준비 중인 E1(A+) 대한항공(BBB+) 동원시스템즈(A) 등도 투자 수요 확보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우량 신용도를 갖춘 SK텔레콤(AAA)과 SK엔무브(AA)는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각각 1조1800억원, 1조5150억원의 ‘뭉칫돈’을 받았다.일각에선 한전채 리스크가 지난해처럼 채권시장 경색을 유발하는 단계까지 확산하진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한전채 발행액이 적지 않지만 금융당국의 은행채 발행 조절 기조 등을 고려하면 급격한 유동성 경색까지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주/이슬기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