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처럼 노예같이 살기 싫어"…집 나간 '백수 아들' 끝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사랑의 화가' 마르크 샤갈

가난한 부모님이 쏟은 애정
'운명의 여인' 아내와의 사랑
전설을 만들다
마르크 샤갈의 '아버지'(1911). 지난해 11월 뉴욕 필립스 경매에 출품돼 약 100억원에 낙찰됐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늘 지독한 생선 비린내가 났습니다. 아들은 그게 싫었습니다.

생선가게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종일 무거운 생선 궤짝을 날랐습니다. 그러지 않을 땐 청어를 이 상자에서 저 상자로 옮겨 담았습니다. 손이 얼어붙는 건 일상이었고, 햇빛이 비치면 옷에 찌든 생선 기름이 빛을 반사해 불쾌하게 반짝였습니다. 그렇게 버는 돈은 고작 한 달에 20루블. 평균은 조금 넘겼지만 9남매를 먹여 살리기엔 벅찬 돈이었습니다. ‘마치 노예 같은 삶이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어느 날 저녁, 아들은 부모님께 말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어요. 미술 학교에 보내주세요.”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하늘과 별을 들여다볼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아버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 철없는 놈아. 정 그렇게 부모 속을 썩이고 싶다면 받아라.” 그리고 아버지는 돈을 꺼내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미술 학교 수업료, 5루블이었습니다. 누가 가져갈세라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돈을 주운 아들의 이름은 마르크 샤갈(1887~1985). 그는 훗날 ‘사랑의 화가’로 불리며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거장 중 한 명이 됩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그의 굴곡진 삶과 작품세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가엾은 아버지, 작품이 되다

1920년 33세때 찍은 샤갈의 사진.
샤갈은 원래 화가가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887년 러시아 제국의 작은 도시 비텝스크(현재 벨라루스)에 있는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은 정부가 정해준 곳에서만 살 수 있었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좋은 직업을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습니다.

생선가게 일꾼으로 아홉 남매를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과묵하고 무뚝뚝한 남자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말할 힘조차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교회를 다녀온 뒤 일터로 떠났습니다. 저녁쯤 녹초가 돼서 돌아온 뒤에는 식탁에 앉아 반쯤 졸며 초라한 식사를 입에 넣었습니다. 샤갈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슬픈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보였다.”
'예술가의 아버지'(1907).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들을 사랑했습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요.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주름진 갈색 손으로 주머니에서 빵 몇 조각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주곤 했다. 아버지가 준 빵은 접시에 담겨 식탁에 올라왔을 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워킹 맘’이었던 어머니도 항상 따뜻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품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우리의 식탁에는 언제나 버터와 치즈가 놓여 있었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배가 고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당시 유대인은 공립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50루블을 마련해 교사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샤갈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부모의 이런 사랑은 결국 샤갈의 인생을 바꿔놓고야 맙니다. 샤갈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가 부모님께 “미술 학교에 보내달라”고 한 게 19살 때. 없는 형편에도 뇌물까지 줘가며 장남을 가르쳐서 이제 보탬이 좀 되나 싶었는데, 예술가가 되겠다니 부모님이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결국 부모님은 아들의 말을 들어줬습니다.
'우유 한 스푼'(1912).
샤갈이 대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미술 유학을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쉰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가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둬야겠다. 나는 돈이 없어. 너도 잘 알겠지만. 이게 내가 모은 전부다. 이 이상 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고는 식탁 아래로 27루블을 던졌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조금씩 아껴 마련한, 월급보다 많은 비상금. 샤갈은 울면서 그 돈을 주웠습니다. 아마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길을 떠나는 샤갈에게 아버지는 종이 한 장을 쥐여 줬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얻어 온 유대인 통행 허가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을 떠난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후원자를 만나 1910년 파리로 갔습니다.
'나와 마을'(1911).
처음에는 물고기 한 마리를 이틀에 걸쳐 나눠서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지만, 샤갈은 강렬한 색을 쓴 특유의 화풍으로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감의 원천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샤갈은 머나먼 고향마을과 부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러시아에서 샤갈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선생님(레온 바스크트)은 파리에서 샤갈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의 그림 속 색들이 제각기 노래를 부르는 것 같군.”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1913).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생일'. 1915년 결혼 몇 주 전 완성했다. 젊은 연인들 사이의 행복한 사랑의 감정이 강력하게 전달된다.
그러던 중 샤갈은 운명의 여인 벨라와 1915년 결혼합니다. 그녀는 똑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눈은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영혼이다.” 활짝 피어난 샤갈의 마음처럼 그의 작품세계도 사랑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이 시기 샤갈은 몽환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색을 썼고, 작품 어디에나 벨라를 등장시켰습니다.

샤갈과 벨라의 모습.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샤갈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의 성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말이지요. 또 러시아를 방문하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샤갈 부부는 파리로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공산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 살아보려고도 했지만, 다른 화가들의 견제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샤갈은 벨라와의 사랑으로 이런 슬픔과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은 샤갈 부부는 1923년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샤갈은 이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합니다.
'그린 바이올리니스트'(1923~1924). 이 작품에는 작가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겨있다. 음악과 춤은 신과의 교감을 의미한다는 비텝스크 유대인들의 신앙에 대한 내용도 함께 녹아 있다.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진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이 작품에서 이름을 따왔다.
하지만 고난은 다시 시작됐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 본격적으로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번지기 시작한 겁니다. 유명 유대인 예술가 샤갈은 나치에게 제물로 삼기 딱 좋은 타깃이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샤갈의 작품을 “삐뚤어진 유대인의 영혼을 보여준다”고 콕 집어 비난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샤갈은 생명이 위태로워졌습니다.

1941년 샤갈과 벨라는 간신히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이곳에서 샤갈 인생 최대의 불행이 닥칩니다. 망명 생활 3년 만에 벨라가 병으로 목숨을 잃은 겁니다. “암흑이 내 눈앞으로 모여들었다.” 샤갈은 이렇게 썼습니다. 고향인 비텝스크는 전쟁으로 파괴됐고, 유대인 학살로 수많은 고향 사람들이 죽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깊어져만 갔습니다. 혼자가 된 그는 1947년 그는 아내와의 추억을 좇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도시 생폴드방스에 정착했습니다.
'그녀의 주변'(1945). 벨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그린 그림이다. 중앙에는 비텝스크의 밤 풍경이 보이고, 이를 딸이 들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아내를 이끌고 하늘로 올라가는 젊은이가, 앞에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한 벨라와 저승의 하늘을 쳐다보는 샤갈 자신의 모습이 있다.

언제나 사랑은 이긴다

하지만 샤갈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바바라는 여인을 만나 재혼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UN 본부와 시카고 예술 연구소, 파리 오페라 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등에 많은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남기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97세가 되던 1985년,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새롭게 그릴 그림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창성. 얼핏 보면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은 샤갈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독창성의 핵심은 ‘조화’였습니다. 샤갈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야수파 등 많은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샤갈은 고향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 유대인 특유의 정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그러니까 자신이 겪은 모든 걸 그림에 한데 녹였습니다. 예를 들어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고기는 그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샤갈이 UN본부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평화의 창'(1964).
세상에 샤갈은 오직 한 사람뿐. 하나밖에 없는 삶을 작품에 녹였으니 그림이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 모든 것들을 한데 결합한 접착제는 샤갈이 부모님과 벨라에게 받았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 비극을 겪은 샤갈이 언제나 사랑과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2021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42억원에 낙찰된 '생 폴 드 방스의 정원'(1973).
샤갈 자신부터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지만 성당이든 교회든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 줬거든요.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수백 년에 걸쳐 서로 멀어져 버린 종교와 예술 사조들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20세기 거장 중에서도 전혀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샤갈뿐”(인고 발터)이라고 했습니다.

결국에는 사랑입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나를 나이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 그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결정되니까요. 샤갈의 그림처럼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1975). 오는 5월 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왼쪽 아래 등장하는 연인은 샤갈 자신과 벨라다.
그래서 샤갈은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채는 사랑이다.”사랑으로 가득 찬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마르크 샤갈(인고 발터, 라이너 메츠거), 샤갈(코그니에), 샤갈(프란츠 마이어), 꿈꾸는 마을의 화가(샤갈) 등 서적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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