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색 뺀 광주비엔날레, 다시 모두의 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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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큐레이터 영입후163만 명. 1995년 열린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찾은 국내외 관람객 수다. 국제미술전을 통틀어 좀처럼 볼 수 없는 수치다. 첫 행사라 중앙정부와 광주광역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영향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전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란 게 미술계의 평가다.
광주비엔날레 대변신
글로벌 작가 79명 출품
테이트모던 출신 이숙경 감독
예술성 높은 작품 위주로 전시
제3세계 국가·소수자 등 다뤄
전시장 밖에선 여전히 설전
박서보예술상 놓고도 '시끌'
"미술계 대다수는 변신에 호평"
실제 그랬다. ‘국가대표 작가’인 백남준을 필두로, 당시 잘나가는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이 몽땅 참여했다. ‘미술 변방’에서 열린 비엔날레의 성공에 세계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고, 일본 요코하마 등 세계 여러 도시가 광주를 따라 했다.아이러니하게도 광주비엔날레의 최고 전성기는 1회였다. 2회부터 꺾이기 시작하더니 지난 10여 년간 관람객 수가 연간 20만~30만 명에 그쳤다.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관람객은 5분의 1 토막 났다. 미술계에서의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민중미술’ 등 정파성을 지나치게 따지다 보니 그렇게 됐다. 행사 직전까지만 해도 많은 미술인이 “올해도 2년 전과 비슷할 것”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유다.
정치색 빼고, 수준 높이고
지난 5~6일 찾은 광주 북구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분위기는 2년 전과 사뭇 달랐다. 이곳에서 만난 미술계 인사들은 “생각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이들은 달라진 이유로 새로운 예술감독을 꼽았다.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국제미술 수석큐레이터로 일하는 이숙경 예술감독(54)의 역량이 힘 빠진 광주비엔날레에 ‘인공호흡기’를 달았다는 얘기였다. 그는 올해 주제를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로 정했다. 도덕경 78장 ‘유약어수’(柔弱於水·아무리 강한 것도 약한 물을 이기지 못한다)에서 따왔다.이 감독은 전시 주제에 맞춰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부드럽게’ 펼쳐냈다. 전 세계 79명의 작가가 소외된 제3세계 국가와 이민자들의 이야기, 약자와 소수자 문제 등을 주제로 만든 작품들을 연결했다. 현대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라 새롭지는 않지만, 이를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풀어냈다는 평가가 많았다.
예컨대 ‘광주 정신’을 표방하는 첫 섹션(은은한 광륜)은 말레이시아의 작가그룹 팡록 술랍이 5·18민주화운동을 형상화한 목판화 ‘광주 꽃피우다’로 시작한다. 이는 태국 출신 작가 타스나이 세타세리가 태국의 부패한 권력과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 ‘거품탑’, 미국 출신 작가 크리스틴 선 킴이 청각장애를 소재로 제작한 작품 ‘모든 삶의 기표’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광주의 역사를 담은 작품으로 시작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인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이전 전시에서 보여준 거친 정치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광주에서 태어나 5·18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경험한 강연균 화백(82)의 작품 ‘화석이 된 나무’도 완전 추상화다.전시는 전통적인 정신세계(조상의 목소리), 이민자(일시적 주권), 생태·환경(행성의 시간들) 등을 주제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큼직한 글씨로 쓴 간결한 설명이 눈에 띈다. 상세 설명은 ‘가이드북’에, 심층 분석은 도록에 담았다.
“광주 색깔 빠졌다”고 반발도
이런 변화를 모두가 달가워한 것은 아니다. 광주 미술계 일각에선 “지역색이 너무 옅다”는 비판을 내놨다. 전시장 밖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개막식 참석 여부 등 정치적인 문제를 놓고 설전이 오갔다. 박서보 화백(92)이 지난해 100만달러(약 13억원)를 기탁해 올해부터 시상하기 시작한 ‘박서보예술상’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한 예술가는 비엔날레 개막식에서 “광주비엔날레가 ‘운동권 미술’을 하지 않은 박 화백의 이름을 딴 상을 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1인 시위를 했다. 이에 대해 미술계 한 인사는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선 광주비엔날레의 변화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박서보예술상 1회 수상자로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코 없는 코끼리’를 만든 엄정순 작가가 뽑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대표되는 제작 방식을 통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관한 고찰을, 코끼리라는 동물을 통해 자연과 동물 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본전시 외에 국립광주박물관 등에서도 공식 전시가 열린다. 남구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펼쳐지는 비비안 수터, 앤 덕희 조던 등의 전시는 젊은 층에 특히 인기가 높다. 여유가 있다면 캐나다 프랑스 우크라이나 등 9개국이 광주 시내 곳곳에서 펼치는 ‘파빌리온 전시’도 둘러볼 만하다. 7월 9일까지.
광주광역시=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