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 '∞'…맘대로 조합해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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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6
앤 카슨 출간‘책’의 정의에 도전하는 책이다. 아코디언처럼 모든 페이지가 하나로 이어진 책 <녹스>를 국내에 출간한 출판사 봄날의책이 이번에는 22개 소책자로 쪼개진 <플로트>를 냈다. 두 책의 저자는 캐나다 고전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이다.
책 한권, 22개 소책자로 나눠
읽는 순서 따라 다른 의미 만들어
<플로트>는 ‘떠다닌다(float)’는 뜻의 제목대로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22개의 소책자가 접착되지 않은 채 PVC 케이스 안에 목차, 옮긴이의 말 등과 담겨 있다. 각 소책자에는 카슨의 시와 산문, 비평, 희곡, 논문, 강연록, 축사, 전시 안내문 등이 적혀 있다.한국어판 책도 원서의 형태를 그대로 본떴다. 본문뿐 아니라 외형에도 저자의 집필 의도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카슨은 목차 아래 “순서에 구애받지 마시고, 자유롭게 읽어주세요”라고 적었다.
누가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된다. 22개의 소책자를 조합하는 방법은 산술적으로 11해2400경727조7776억768만 가지에 달한다.
처음 케이스에 들어가 있던 순서(제목 가나다순)대로 읽어도 되고, 일부만 골라 읽거나 묶어 읽을 수도 있다. 어떻게든 상관없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목차가 무의미해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고약한 책이면서,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무한대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책”이라고 설명했다. 독자가 있어야 완성되는 책이다. 신해경 번역가는 “읽기라는 행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 책을 나만의 독특한 꽃다발로 만들 수 있다”고 썼다.카슨이 왜 이런 책을 고안했는지는 속 시원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소책자 ‘108’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카슨은 한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요점만 메모했다가 불완전하게 기억한 경험을 적었다.
그는 “나는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며 “그때 나는 ‘부유(floatage)’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 오해에서 문학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 역시 <플로트>를 읽는 여러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