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사 이해에 필요한 세 가지 사실

[arte] 한찬희의 너무 몰랐던 요즘 미술
모든 역사가 그렇듯 한 세기의 특징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1900년과 1901년의 차이보다는 전쟁이나 혁명, 발명 등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이 사회의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냈고, 당대 예술가들도 이렇게 변화된 정책과 새로운 기술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것이 하나의 숙제처럼 여겨졌다.

사진이 작품을 대체하다

19세기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술은 ‘사진’이다. 1827년 조제프 니엡스가 인류 첫 사진을 성공한 이후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여 상업적으로 사진이 활용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사진기가 보편화되기 시작해 개인이 촬영한 사진을 현상 및 인쇄하는 서비스가 생겨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당시 활동했던 화가들의 주요 수입원은 초상화와 종교화였다.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보여줄 수 있는 초상화를 주기적으로 의뢰했고, 살롱전에서 수상을 하거나 아카데미에서 주요 직책을 가진 유명한 작가일 수록 그 수요는 높았다. 하지만, 사진술이 발명된 후 그들은 더이상 초상화를 주문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상의 단순한 모사의 개념으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 그림은 비효율적인 수단처럼 여겨졌다.

한 점을 그리는 데에 수개월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유명한 작가들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려면 몇 달, 몇 년을 대기해야 했다. 사진은 20분이면 충분했다. 사진 한 장으로 모든 묘사가 이루어지며, 그림보다 더 사실적이다.

1842년 루이 오귀스트 비쏭(Louis-Auguste Bisson)이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방식으로 촬영한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오노레 드 발자크아직 기술력이 충분하지 않아 피사체는 20분간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시간은 1분으로 줄어들면서 본격적인 상업사진의 시대가 온다.

예술가들은 기술 앞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데에 전념했다.

단순 모방의 영역은 사진기에게 내어주고 예술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예술의 주도권이 서서히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들에게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작가가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조형적 언어를 연구하고 표현하고자 했으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도 더이상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그렸는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가 유럽에 퍼져…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는 다양한 미술사조들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그 복잡성 자체로 대변된다.

이런 현상은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동이 편해지고 소식이 빨라지면서 예술가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경험의 영역이 국경 너머로 확대됐다.

실제로 19세기 말에는 전화가 발명됐고, 당시 파리에만 기차역이 6개가 있을 정도로 기차를 이용한 이동이 보편화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비행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19세기 말 유럽에서 활동 중인 화가들에게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소식은 아마 인상주의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상파의 활동은 단순히 전통을 거부한 비주류 작가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시대 작가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어떠한 조형적 언어를 만들어 가는지, 어떻게 동료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는지에 대한 활약상이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것은 ‘낙선전’(Salon des refusée)의 개최다. 당시 예술 작품들이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되어 대중들에게 소개조차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불합리하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나폴레옹 3세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낙선전’(Salon des refusée) 개최가 성사됐다.

1863년 열린 첫 낙선전은 예술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살롱전’ 보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인상파의 초창기 멤버였던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가장 큰 화제가 된다.
사진출처 = 구글
Edouard_Manet_-_Luncheon_on_the_Grass_-_Google_Art_Project

이 사건은 더 이상 특정 집단으로부터 심사나 승인을 받지 않아도 자유롭게 전시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을 의미한다.

이후 한 ‘익명의 작가 단체’ (Société Anonyme)는 작가들이 직접 섭외한 장소에 30인 단체전을 열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작가들이다.

당대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했지만, 그들은 작가의 뚜렷한 주체성이 반영된 그림을 화폭에 옮겨내고자 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언제든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현대미술 영감의 원천, 폴 세잔

마지막으로 20세기 미술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0-1906)이다.

인상파라는 이름 아래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인상파를 뛰어넘어 20세기 초반 프랑스 내 주류를 이룬 입체주의와 야수파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훗날 피카소가 세잔을 ‘(당대 활동했던 화가) 모두의 아버지” 라고 지칭했을 정도다.

그가 이토록 후대에도 인정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잔은 화가로 활동했던 약 45년의 기간 동안 회화 900여점과 수채화 400여점을 그렸다. 매 작품마다 공간과 형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가 그린 생트빅투아르 (Sainte-Victoire) 산은 언뜻 보면 자연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잔은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을 구현해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인상파의 붓터치가 공기의 흐름과 풍경의 찰나를 담아낸다면, 세잔은 절제된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면서 풍경의 형태감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는 풍경보다 사물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릴 수 있는 정물화와 초상화를 통해 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익혔다.

자연 중에서도 바다가 아니라 산을 모티브로 삼은 이유도 가장 움직임이 더딘 풍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폴 세잔의 자화상, 1875~1877, 노이어 피나코테크
폴 세잔의 자화상, 1875~1877, 노이어 피나코테크

세잔은 20세기 초 인상파 이후의 회화에 대해 고민하던 동시대 작가들에게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다.

세잔은 자신이 아끼던 후배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에게 예술에 대한 고찰을 담은 편지를 보내곤 했다.

베르나르는 훗날 그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자연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기둥, 구, 원뿔을 기반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 단순한 형태들을 그릴 줄 알아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과와 오렌지, 1899, 오르세미술관
사과와 오렌지, 1899, 오르세미술관

세잔은 이렇게 색채적 균형만큼이나 형태에도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조형언어로 치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

본질적인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세잔의 회화는 이후 입체주의의 피카소, 레제 뿐만 아니라 말레비치, 몬드리안 등 현대 추상을 대표하는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색과 형태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 화폭을 구성하는 추상화의 개념과 맞닿게 되는 것이다.

1996년 지금의 유로로 바뀌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프랑스 화폐 100프랑 지폐에서는 폴 세잔과 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사과가 있는 정물화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