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정리 할래요?"…그날부터 인생이 달라졌다

[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 하우스콘서트의 문을 열다
얼마 전 하우스콘서트의 유튜브 생중계 중 실시간 채팅창에 반가운 댓글이 달렸다.

“그때 대학생이었고, 지금은 40대 아저씨가 됐네요. 하하.”“저 와인잔 들고 피아노 앞에서 찍은 사진 아직 있어요.”

“연희동에서 하던 하콘 ^^ 골든레트리버가 떡 하고 지키고 있었죠.”
지금의 하우스콘서트는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청사)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시작은 연희동의 일반 가정집이었다. 요즘은 워낙 하우스콘서트라는 같은 이름의 공연들이 많은데, 그건 하우스콘서트가 하나의 공연 형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희동 가정집에서 출발한 우리의 하우스콘서트는 바로 그 씨앗이었다. 그리고 나는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때의 나도 대학생이었다.


하우스콘서트와의 첫 만남

2004년 5월의 어느 금요일. 스물둘의 나는 연희동 한 가정집 앞에 서 있었다. 빨간 우체통 옆으로 ‘HOUSE CONCERT’ 팻말이 걸린 대문을 들어서니 커다란 레트리버 한 마리가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나를 반겼다.
현관 앞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의 행렬 속에 내 구두도 살포시 끼워두고 2층 거실을 향해 조심스레 올라갔다. 낯선 집에 발을 들이는 어색함도 잠시, 곧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두운 듯 차분한 조명, 25평의 공간에 커다랗게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음반과 책들, 공간에 나지막이 흐르는 음악소리….

나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공간이 주는 예술적 기운에 압도된 채로 공연을 관람했다. 제55회 하우스콘서트였다.

공연 후 이어진 와인파티에서 나는 이 집의 주인장을 찾아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아마도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을 것이다. 자주 오고 싶었지만, 집과 꽤 거리가 먼 데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대학생에게 입장료 2만 원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자주 와요”라며 느긋하게 건네는 주인장의 인사에 제법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인장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공연 날 와서 신발 정리 할래요?”


하우스콘서트의 스태프가 되다

나는 그렇게 하우스콘서트의 스태프가 되었다. 신발 정리를 하지 않을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매번 이 예술적 기운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대학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무언가 사회로 진입하는 것 같은, 정말 성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나는 당시 마음껏 누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관객들이 벗어 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을 시작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일, 와인파티를 준비하고 치우는 일, 홈페이지에 댓글을 쓰는 일 등이 차례로 내게 주어졌다. 스태프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하우스콘서트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의논하고, 공연을 올리고 마무리하는 시간은 대학에서 학점을 잘 받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고 기쁘고 중요한 일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돌아간 자리에서 몇몇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 CD나 DVD를 보고 들으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 나눈 시간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무보수, 자원봉사자…

요즘 같은 시대에 이 두 단어를 언급하기란 참으로 조심스럽지만, 하우스콘서트 스태프는 무보수 자원봉사자였다. 하지만 이곳 주인장은 보수의 유무와 관계없이 스태프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솜씨가 부족하더라도 무엇이든 해볼 기회는 무한대로 열려 있었지만,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고 노력하지 않으면 불벼락을 맞았다. 그중에 가장 많이 혼나고 욕을 본 사람이 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가르침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 그래서일까? 우리는 처음부터 주인장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스물 한살의 하우스콘서트와 나

박창수 선생님의 하우스콘서트는 이제 948번째 공연을 지났다.
연희동 시기 이후 여러 번 장소를 바꾼 하우스콘서트는 21년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대학생으로 이곳에 발을 디뎌 이제 40대에 진입한 나는 하우스콘서트가 성인이 되는 동안 기획자로 함께 성장했다. 하우스콘서트의 모든 기쁨과 아픔의 순간들도 함께 해왔다.
산 증인이라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하우스콘서트가 언제 중단되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수없이 많았다는 점에서 조금 아프기도 하다. 경제적인 어려움, 사람으로 인해 겪는 상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기쁨보다는 어려운 순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그 모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연희동 시절의 사진을 꺼내본다. “공연 날 와서 신발 정리 할래요?”라고 박창수 선생님이 다시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 답은 여지없이 ‘예스’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곳이므로, 나에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을 내어준 곳이므로, 그리고 내가 오래도록 가꾸고 사랑한 곳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