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얻은 모든 정보가 거짓이라면?

[arte] 심완선의 SF라는 세계
택시에 타서 창밖을 보던 중이었다. 예전에 본 영화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결말은 기억하는데 무슨 영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생각하면, 영화 내용을 모조리 잊어버리더라도 제목 하나를 기억하는 쪽이 유용할 것이었다.

내용이야 검색하다 보면 나오기 마련이다. 정보의 집약체인 인터넷 공간은 나의 흐릿한 기억보다 훨씬 풍부하고 생생한 내용을 품고 있다. 그렇게 기억과 기록을 저울질하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기록이라고 다 정확하지는 않잖아? 남들도 착각하거나 창작하곤 하잖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연스레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현실과 가공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SF 작가 듀나의 환상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은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IMDb에서 우연히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영화를 알게 된다. 조악한 정보만 등록된 상태라 실제 존재하는 지조차 모를 영화다. 알고 보니 정말 누가 재미삼아 만든 가짜 영화였다. 몇몇 사람이 해당 페이지에 적당한 내용을 추가한다.

주인공은 그들 중에서 본래의 창작자를 만나, 이 가짜 영화의 존재를 더욱 그럴싸하게 꾸미기로 한다. 여기까지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는 둘의 손을 벗어나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를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제시한 영화 관련 책자에는 관련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마침내 주인공은 가짜 영화의 진짜 내용을 시청한다. 덕분에 질문이 터져나온다. “만약 전 세계가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자기가 포토샵으로 만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까?”

주인공은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무에서 창작된 것이라도 “기록이,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적 기억이 단단하게 뒤를 받치는 한” 허구는 현실같이 유효하게 변한다. ‘가공되었다’는 사실은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과 이어지는 듯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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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상세한 백과사전을 발견한다. 그리고 가공의 국가 ‘틀뢴’이 기존의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음을 감지한다. 허구로 만들어낸 과거가 인간의 기억을 점령한다. 사실 이조차도 “우리가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심지어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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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는 이런 말이 등장한다.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행위이다.”

인간이 만든 허구가 실재를 구성한다는 미로 같은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픽션의 미로와 달리 일상에서 만나는 가짜는 그리 반갑지 않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인간의 얼굴을 다른 이미지에 그럴싸하게 합성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은 수많은 악용사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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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하지 않은 일을 마치 언젠가 실행한 것처럼 보여주는 영상 기록을 만들기 때문이다. 혹은 부정확한 내용을 사실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챗GPT의 모습이 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SF 작가 테드 창은 챗GPT를 일종의 텍스트 압축 알고리즘이라고 평한다. 그에 따르면 챗GPT는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 다른 말로 표현하기 때문에 놀라워 보일 뿐이다.

이건 실제로는 정확한 압축조차 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을 손실시키는, 그래서 정보를 오히려 열화(劣化)시키는 방식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영화를 찾으려 관련 키워드를 입력한 끝에 제목을 알아냈다. 존 스튜어트가 감독한 영화 ‘이리지스터블(Irresistible, 2020)’로, 미국 선거를 둘러싼 소동을 보여주는 정치풍자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보이는 대로 믿으면 안 된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지루하고 뻔할지 몰라도 다시금 주목해야 할 결론이다. 우리가 쥐어야 할 사실을 열화시키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