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힘든 '이상한 여자'는 '올빼미' 덕에 불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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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 뮤지컬뮤지컬은 유독 빅토리아 시대를 즐겨 다룬다.
대표적으로 <지킬 앤 하이드>, <스위니 토드>, <잭 더 리퍼> 등 잘 알려진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들이 떠오른다. 창작 뮤지컬로는 2017년에 초연된 <레드북>이 있다. 하지만 <레드북>은 뭔가 다르다.
단연코 주인공 안나 때문이다.안나의 첫 일성(一聲)은 “난 뭐지?”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터져나온 질문이다.
사람들은 안나를 ‘이상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못 됐다’, ‘죽어라’고까지 외친다.
사람들이 안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안나가 일 하는 싱글 여성이라는 점이 첫 번째라면,
자기 세계가 확고한 여성이라는 점이 두 번째다.
사실 안나로서는 ‘그냥’ 생각대로 사는 것일 뿐인데, 그것이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고 힘든 삶이다.
그렇다면 안나는 여성 해방을 외치는 투사일까? 아니, 안나는 오히려 위트 넘치는 명랑소녀에 가깝다.
슬플 땐 ‘올빼미’를 상상하는 엉뚱함도 갖췄다.
맞다, 이 올빼미는 당신이 상상하는 바로 그 올빼미다.
안나의 영원한 사랑, 안나의 욕망의 대상이다.
겉으로 보아 안나는 행복할 구석이 없는 여성이다.
전직 하녀였고 지금은 그저 가난한 싱글 여성이다. 심지어 안나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남편이 없는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법의 규제도 받는다.
하지만 안나는 불행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올빼미 때문이다.
안나의 올빼미 사랑은 건강한 것이다.
그것은 은밀하고 퇴폐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건강한 활력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망이다.
하녀 시절 확인도 했다.
안나는 자신이 모셨던 노부인 바이올렛이 아주 오랜만에 성욕을 느껴 잠시나마 건강을 되찾는 것을 보았다.
꺼져가던 노부인에게 안나가 ‘빨간 이야기’를 해준 탓이다.
바이올렛은 에너지 넘치는 정원사 헨리를 생의 마지막에 사랑하고 행복하게 죽는다.
바이올렛은 안나에게 유산을 남긴다.
억압은 오히려 퇴폐를 낳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알 리 없다.
안나와 가장 가까운 브라운마저 이 이야기에 모욕감을 느낀다.
브라운은 누군가.
바로 바이올렛의 손자, 그녀의 법률대리인 변호사다.
그는 ‘고상함’을 행동과 생각의 계율로 배우고 자란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다.
하지만 안나는 그를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안나는 사랑은 계절처럼 변하는 것임을, 당위나 의무가 아님을 눈을 반짝이며 알려준다.
이 이야기는 부드럽고 강력하게 브라운을 사로 잡는다.
그는 일상을 뒤덮고 있던 고상함의 껍질을 벗고 ‘본성의 자연스러움’에 포획당한다.
그래서 브라운은 고작 자신의 타이피스트일 뿐인 안나를 더할 나위없이 사랑하게 된다.
안나의 명랑함을, 솔직함을, 엉뚱함을,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사랑하게 된다.
올빼미는 이제 안나의 현실 속에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안나가 자신의 올빼미를 소설로 만들어 발표해 버렸기 때문이다. 안나는 어쩌면 천성적인 이야기꾼이었을 것이다.
바이올렛과 브라운은 자신의 이야기가 가진 힘을 확인한 최초의 독자였을 것이다.
독자는 이제 세상 전체로 확장된다.
사람들은 여성-작가가 가진 이야기의 힘을 느낀다.
하지만 안나는 그 힘 때문에 거꾸로 강제노역과 영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인다.
브라운은 안나에게 잠시 ‘미친 척’하자고 한다.
그것이 올빼미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나의 이상함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거짓말 대신 정면승부를 택한다. 우리는 안나의 선택이 그녀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가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안나는 자신의 삶에 언제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행히도 안나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다.끝까지 명랑하고 솔직해서 용감해야 했던 안나를 통해 용기를 배운다.
안나는 희생적인 엠마도, 희생양인 루시도 아닌 ‘나를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19세기에서 온 올빼미 러버-안나가 좋다.
그녀 만큼 ‘이상한(extraordinary)’ 19세기 여성은 뮤지컬 무대에서 아직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