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무대에 선 '백발 거장'…무섭도록 집요했던 그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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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아무튼 바이올린-협연의 추억지휘자가 모시고 나온 백발 노인이 단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협연이 예정된 거장 피아니스트와의 첫 만남에 단원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흔히 보는 옆집 노인처럼 조금은 추레하고 평범했다. 게다가 과묵한 듯 무표정하기까지 했다. 오케스트라와 정서적 교감이 꼭 필요한 협연에 적합할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워낙 대단한 커리어와 유명세를 지닌 분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조금 위축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재미있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스태프가 농담을 섞어 투덜대는 것이다.“아휴, 연습을 어쩌면 그렇게 하루종일 하시는지, 말도 마세요. 연습실 피아노 제대로 관리도 안된 거 아시죠? 피아노가 어떻든 괜찮다고 자꾸 그러시는데 민망하기도 하고…."
의아했다. 실은 이번 연주 레퍼토리부터 그랬다. 세상 모든 곡을 연주해보았을 것 같은 분이 굳이 처음 무대에 올리는 익숙치 않은 곡을 골랐다. 그리고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연습에 매진했다.그에게 너무나 작은 무대인데 왜? 그는 연주할 피아노를 만져보고 쳐보고 익숙해지는 것에도 역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이 진행되며 조금씩 그 ‘완벽주의’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단원들 입장에서 전혀 쉬운 협연자가 아니었다. 엄격하고 깐깐했다. 그 양상은 선을 넘는다는 표현이 적합할만큼 이례적이었다. 그는 자꾸만 연주를 멈췄다. 그리고 단원들에게 지극히 예민하고도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
“그 부분에서는 좀 더 빠르게 활을 움직여 줘야지요.” “방금 그건 포르테가 아니에요. 강약의 조절이 왜 어려울까요?”
“여기서 톤을 다듬고 다이내믹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의 한국말은 조금 어눌했고 뒤쪽 단원들에겐 잘 들리지 않을만큼 목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집요하고 철저했다. 지휘자는 안절부절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원들은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지휘자 입장에 다소 이해되기도 했고, 이렇게 비효율적이며 오래 걸리는 리허설은 흔치 않으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하면 내가 할 수가 없어요.” 툭툭 끊기는 연습 탓에 모두 지쳐갈 무렵, 그 분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들릴 듯 말 듯 했던 그의 혼잣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의 예민함과 집요함이 그저 노인의 꼬장꼬장함, 거장의 우월감이 아니구나. 이 사람은 조금의 타협도 없이 치열하게 만들고 있구나. ‘당신들’이 철저히, 정확하게 조력해야만 하는 ‘자신의 음악’을. 그는 태도가 세련된 사람이 아니었고, 거장다운 여유나 과시도 없었다. 심지어 그토록 지난한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올린 음악은 한창 때의 영민함과 파워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관객들과 단원들은 한목소리로 “역시! 소리부터 달랐어요. 감동적인 무대였어요”라고 했다.
내가 느낀 감동은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했다. 단 한번의 리허설만으로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연주자는 대단하지만 한편으로는 흔하다. 그러나 이토록 작은 무대에서조차 어렵게 온 마음을 다해 연주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어쩌면 관객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만을 오롯이 마주보고 작곡가와 깊이 대화했다.이것은 어쩌면 그와 함께 어려운 연습 과정을 거치고 연주를 했던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의 오만이 실은 겸손이었으며 타협하지 않는 고집은 절실함이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연주를 마치고 관객을 마주보며 인사를 하는 그 분의 굽은 등을, 악수할 때 잡은 든든한 손을, 내용을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에스트로 백건우 선생님과의 첫 연주,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연주의 기억이다.
여기저기서 단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전 리허설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괜찮을까요?” 옆 자리 단원이 못내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연주자 스케줄이 오죽 빡빡하면 그랬겠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될거예요. 무대 경험 많고 워낙 잘하는 사람이라.”협연의 경우 통상 연주 전 한두 번 정도 사전 리허설, 연주 당일 무대 리허설 후 실제 연주에 들어간다. 서로 생소한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치는 최소한의 과정이다. 국내외 유수의 콩쿨에서 입상하고 화려하게 등장한 라이징 스타 A씨는 소문난 연습벌레에 완벽한 테크닉으로 각광을 받았다. A씨와 협연 일정이 잡혔을 때 단원들이 내심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전 리허설을 취소하다니. 외국에서 지연된 일정을 소화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무대에 서겠다는 뜻이다.
연주 당일 무대 리허설을 간단히 진행했다. 듣던대로 ‘잘 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여유있는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여기는 알아서 맞출게요.”
석연치 않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단원들을 안심시키고, 지휘자의 의중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 날 A씨와의 협연은 무리없이 잘 끝났다. 그의 기교는 완벽하며 화려했고 카리스마 넘쳤다. 평소 연습을 철저히 한다더니, 게다가 큰 무대에 여러 번 섰으니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공연 후 단원들과 소회를 나누었는데 어쩐지 나는 깊은 곳이 텅 빈 느낌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지만, 너무나 실망스러운 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지 협연자 A씨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그 날의 ‘괜찮았던’ 연주에 대한 아쉬움, 음악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편이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