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가 낳은 작가, 하비에르 카예하로부터 검은 초대장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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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손혜정의 파리지엔느의 예술산책
스페인 출신 현대 미술가 가운데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하비에르 카예하Javier Calleja (1971년생)는 해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뜬 아이가 티셔츠에 적힌 간결한 문구로 무언가를 호소하는듯한 인물화로 잘 알려져 있다.현대미술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아트 토이(Art Toy) 수집가들은 그의 한정판 캐릭터 조각에 열광한다. 한때 ‘제 2의 나라 요시토모(Nara Yoshitomo)’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작가는 이제 누구나 식별할만한 그만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메이저 경매와 미술관 전시를 오가는 현대미술 주요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2월의 어느 날, 세계 각지의 하비에르 카예하 애호가 및 작품 소장가들은 카예하 스튜디오(Calleja studio)로부터 발송된 뜻밖의 검은 봉투를 받았다.작가는 일본과 캐나다 미술관에서 개인전 «Mr. Gunter. The Cat Show»를 성공리에 마치고,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순회지 말라가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봉투에는 작가의 반려묘를 캐릭터화한 Mr. Gunter 로 꾸며진 초대장과 종이인형이 동봉되어 있었다. 작가는 그의 손길이 닿은 것이면 수집을 마다하지 않는 열광적 팬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예하는 이 특별한 초청장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자, 완벽한 21세기형 아티스트인 그가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문화도시 말라가로 예술 애호가들을 초대하는 환상적인 여행을 예고하고 있었다.25년간 창작 활동을 이어 온 카예하가 오늘과 같이, 전 세계 애호가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초대할 만큼의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불과 10여년이 채 되지 않는다. 2013년 친구의 조언으로 인스타그램 계정(@javicalleja)을 열어 스페인 밖 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 카예하는 2014년 4월, 그가 올린 작품 이미지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 포스팅 된 것을 보았다.
해당 게시물에는 순식간에 48만개의 좋아요와 만개의 댓글이 달렸다. 작가 계정은 곧 미술계 관계자들의 레이더에도 포착되었고, 일본과 홍콩에 갤러리를 둔 신지 난즈카(Shinji Nanzuka)와 아이쇼 미우라(Aisho Miura)는 하비에르를 만나기 위해 말라가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이 일사천리로 준비한 2017년 홍콩 아이쇼 난즈카(Ashio Nanzuka)에서의 아시아 첫 전시는 대성공을 거뒀고, 이후 방콕, 도쿄, 상하이, 함부르크, 미코노스, 마이애미 등 대륙을 넘나드는 전시를 개최하며 작가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수준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공 스토리만큼이나 창작에 있어서도 그는 21세기형이다. 카예하는 미술관과 갤러리를 넘어선 한계가 없는 예술을 이해했고, 젊은 컬렉터들을 위한 한정판 에디션 작품과 아트 토이를 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패션 브랜드 미라 미카티(Mira Mikati), 유니클로(Uniqlo), 반스(Vans), 시계 카시오(Casio), 핸드폰 케이스 케이스티파이(Casetify)와 협업하여 컬렉터블한 상품들을 만들어냈고, 디즈니 아시아의 요청으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 미키마우스를 카예하 스타일로 재탄생 시키는가 하면,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 롤스로이스와 협업하여 모델 ‘고스트(Ghost)’의 미니어쳐를 6개 한정 에디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을 단순히 미디어적 관심과 상업적 인기의 결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현대 미술계의 시스템을 잘 간파하는 영리함 뒤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작업하는 엄청난 노력가형 작가가 있다. 그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독자적인 인물상과 매끈한 회화 기술을 결합한 자신만의 스타일과 창작 세계를 만들어냈다.
단색조의 추상적 배경에, 커다란 머리와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을 가진 순수한 아이의 얼굴은 카예하 회화의 주요 모티프다. 깜찍하고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아이는 티셔츠에 적힌 슬로건 같은 문장으로 이내 불순함과 반항기 또는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자아낸다.
ʺForget about it (잊어버려)ʺ, ʺWhy not? (왜 안돼?)ʺ, ʺTry again (다시 시도해봐)ʺ 같은 짤막한 글은 아이러니하기도 비판적이기도 하며, 익살스럽기도 또 한없이 낙천적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처럼 간결하고 효과적인 도상은 즉각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카예하의 힘은 복합적인 것을 단순히 표현하는데 있다.
ʺ오직 한 쌍의 커다란 눈과 티셔츠만으로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비판적일 수 있고, 공감적일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ʺ 고 말하는 그의 작품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 감정을 다룬다.
오늘날 카예하의 작품 소장을 기다리는 컬렉터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작가는 Nanzuka(일본), Ashio Nanzuka(홍콩), Almine Rech(유럽, 미국) 갤러리에 의해 소개되고 있는데,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걸맞은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며, 카예하 스튜디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작품은 2차 시장인 경매에서 100만 달러를 웃도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카예하 회화의 최고 경매가는 2022년 3월 소더비 뉴욕에서 기록한 123만 달러로, 그 뒤를 이어 2021년 크리스티 홍콩에서 114만 달러, 그리고 2022년 소더비 영국에서 112만 달러가 기록되었다.
미술계의 인정과 이 같은 상업적 성공은 18년전 작가가 꿈꾸던, 말라가의 주요 문화 기관 팔라시오 에피스코팔(Palacio Episcopal)에서의 전시를 현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초대 받는 특권을 얻은 260명의 카예하 애호가들은 약속 날짜인 3월3일 전 세계에서 말라가로 모여들었고, 도시 전체가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역사지구를 가로지르는 세르반테스 애비뉴La Avenida de Cervantes에는 «Mr. Gunter» 전시 현수막이 야자수 잎과 함께 나부끼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온통 카예하의 어린 아이 얼굴로 뒤덮인 시내 버스들이 쾌활하게 달리고 있었다.시내 곳곳의 레스토랑과 상점은 물론 초대객들이 묵을 호텔 이곳저곳에는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카예하의 창조물들로 해피 바이러스가 가득했다.
호텔 방에 준비된, Mr. Gunter의 얼굴이 새겨진 온갖 생필품들 가운데 단연 인상적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말라가 지방 신문 Sur지의 오늘 자 1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카예하의 드로잉과 전시 소식이었다.
피카소의 도시 말라가는 하비에르의 명성 또한 이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한 켠에 소개된 대가의 서거 50주년 기념 전시 정보 기사에 카예하는 ʺSoy Picasso(나는 피카소)ˮ라는 문구를 곁들인 초상을 그려 넣었다. 거장에 대한 존경과 그를 닮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트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말라가 중심가 도처에서 카예하의 손길을 느끼며 전시가 열리는 우니카하 재단 문화 센터(Fundacion Unicaja)로 향했다. 재단이 상주하고 있는 곳은 대성당(Catedral de la Encarnación) 옆에 자리한18세기 바로크 양식의 주교관(Palacio Episcopal) 건물로, 말라가 주요 역사 건물 중 하나다.
18년전 다른 미술가들의 전시 설치를 돕는 일을 하며 언젠가 유서 깊은 이곳에서 자신의 전시를 올리리라 마음 먹었던 젊은 예술가의 꿈이 마침내 실현 되었다.
이 전시 및 이벤트를 위해 95명의 스태프와 17개의 기업이 참여했고, 209점의 회화, 조각, 드로잉, 한정판 아트 토이 등이 7개국의 나라에 있는 20개의 컬렉션에서 특별히 대여되었다.
이 전시는 작가 경력에 있어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이자, 고향 말라가에 오마주를 표하는 최대형 전시다. 해외 및 스페인 유명 인사들로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재단 건물의 안마당에는 등신대의 Mr. Gunter조각이 방문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팝문화 최전선의 귀엽기 그지없는 창작물들과 웅장한 바로크 양식 천장화가 인상적인 건축이 만들어내는 간극은 전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에디션 조각으로도 잘 알려진 No Art Here(이곳에 아트 금지), Heads(머리들)를 비롯 Mickey Mouse, Little Maurizo(작은 마우리치오), Thinking Boy(생각하는 소년)등의 작가 시그니쳐 대형 조각들은 각각 한 전시공간 전체를 차지하며 위엄을 뽐냈다.
벽 한 면 전체가 드로잉으로 가득 채워진 전시장에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Pencil boy(연필든 소년) 조각이 구겨진 종이와 스케치북, 널브러진 색연필 사이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바로 옆에 걸린 대형 회화의 You Have No Choice(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문장은 지칠법한 작가를 독려하는 듯 했다.
작품의 색채와 형태 등 조형적 조화를 꾀하여 구성된 세노그래피(전시디자인)는 함께 배치된 작품 간의 대화를 상상하도록 만들며 적극적이고 유며 넘치는 감상을 자극했다.
사이즈 대비를 즐기는 작가는 200cm에 달하는 회화와 높이 30cm의 아담한 작품을 나란히 전시하는 식으로 양극단이 주는 효과를 최대화시켰다. 작가의 초대형 회화작품The Future is Now(미래는 지금)를 더불어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여섯 점의 최신작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 즉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보고 ‘와’ 감탄을 발하는 순간을 찾는다고 말하는 카예하는 말라가에 딱 그런 전시를 이뤄 냈다.
카예하의 갤러리스트Shiji Nanzuka는 한 인터뷰에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말라가가 하비에르에게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정신을 준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그의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적’이기 보다는 ‘말라가적’이다.
고대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문화 그리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자취가 병존하는 다채로움이 숨 쉬는 곳,전시는 9월 6일까지.
파블로 피카소가 유년 시절을 보내며 예술혼을 키운 곳, 카예하가 모두를 위한 아트를 꽃피워낸 곳,
퐁피두 센터와 피카소 미술관을 비롯 열 개가 넘는 순수 미술 기관이 존재하는 문화도시 말라가에서 미적 감각을 드높이는 여름 바캉스를 보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