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맨몸으로 파리에서 뮌헨까지…27일의 기록

[arte] 김동휘의 탐나는 책

베르너 헤어초크 지음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
오래전, 꿈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에서 죽어가는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한 남자가 무작정 뮌헨에서 파리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김연수 소설가는 이 책의 추천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가 들었다는 이상한 이야기는 오래전, 1974년에 있었던 실화였다. 나는 2021년 어느 봄에 동료 편집자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걸어가면 ‘그녀’가 죽지 않을 것이라니. 뭐랄까, 꿈도 자의식만큼 큰 사람이군.

베르너 헤어초크는 뉴저먼 시네마의 거장이면서 기행으로도 유명한 감독이다. 영화 촬영을 위해 바다에서 남미 정글 한가운데까지 거대한 증기선을 통째로 옮긴다든지(심지어 순수하게 인력만으로!). <얼음 속을 걷다> 또한 그 기행(奇行)을 따라가 보는 기행(紀行)록이다. 한겨울에 맨몸으로, 행낭도 없이, 파리에서 뮌헨까지 걸어서 가는 22일.

목표도 이유도 단 하나, 그의 동료이자 스승인 영화평론가 로테 아이스너가 ‘아직 죽어선 안 되므로’. 이 선언을 듣는 순간 그의 걸음과 그녀의 죽음 사이에 대체 무슨 인과가 있는가 싶다면, 일단 이 책을 열어볼 이유가 생긴 셈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시 김연수 소설가의 추천사는 이렇게 맺는다. “죽음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나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건 편집자가 꿈꾸는 추천사이기도 하다. 보탤 말은 없고 덜 것은 더더욱 없는 그런 문장 말이다. 그래도 구태, 사족을 보태자면 이렇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제일은 없다고, 그 셋을 한데 뭉친 것을 우리는 ‘꿈’이라 부른다고.소설이 아니니까 결말부터 말하건대 로테 아이스너는 죽지 않았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마법이라고 부른다면, 헤어초크가 얼음 속에서 걸음으로 써내려간 긴 주문이 성공한 셈이다.

그로부터 8년 뒤 1982년 로테 아이스너는 헬무트-코이트너 상을 수상한다. 책의 말미에는 당시 헤어초크의 축하 연설을 실었다. “그녀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긴 여정을 시작했던 그가 주문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키는 순간이다. “당신은 죽으셔도 좋습니다.”(144쪽) 물론 그가 덧붙이는 말대로, 이것은 무례나 저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유일하게 또 확고하게 알고 있는 죽음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가 불사(不死)의 주문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킨 이듬해, 아이스너는 정말로 독일 영화계를, 뮌헨을, 이 별을 떠났다. 물론 날아서 갔을 것이다. 헤어초크에게, 또 뉴저먼 시네아스트와 그 친구들에게 날개를 선물했던 그이므로.

헤어초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어딘가의 얼음 속을, 때로는 불길이나 밀림 속을 걷고 있다.
다행히도 그가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는 소식은 없다. 물론 그가 결심한대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아이스너에게 걸었던 그 주문을 따라, 걸어서 또 날아서, 그의 곁으로 향할 이가 줄지어 있을 테니까.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내줄 준비를 마치지 못했으니까. “나중이라면……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가 허락할 때까지는.”(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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