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안돼" 비아냥 잠재운 뚝심…K-반도체 신화 '결실' [강경주의 IT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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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78회
K-반도체 신화 '황철주 매직'…혁신으로 주성 30년 이끌어
D램 제조 핵심인 '커패시터' 증착 장비 세계 최초 개발
절박함 몸에 배어있어…'혁신 중독자'라는 별칭 얻기도
"소부장 육성 않으면 반도체 강국 지위 사라질 것" 경고
전쟁에서 지면 노예가 되고, 경쟁에서 지면 거지가 된다.경부고속도로 신갈IC 인근에서 서울 방향으로 달리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면 주성엔지니어링 용인 R&D센터가 보인다. 이 건물 로비 정면에는 가로 18m, 세로 13m의 초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어 방문객을 압도한다. 황철주 주성 회장에게 태극기의 의미를 묻자 "책임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반도체를 둘러싼 엄중한 국제 정세 속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장비 기업으로서 직원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R&D센터 내부 벽면에 새겨진 황 회장의 비장한 어록들은 하나같이 책임감을 독려하는 내용들이었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을 바라보는 황 회장의 절박함이 엿보였다.
빈농의 6남매 막내에서 반도체 장비 회사 일구기까지
국내 대표 반도체 장비 기업 주성이 지난 13일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황 회장은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이라며 "여전히 주성은 갈 길이 멀다"고 채찍질했다. 올해 64세인 황 회장은 한국 반도체 장비 업계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금의 업적을 이루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경북 고령 빈농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황 회장은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판잣집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동양공고 전자과, 인하공전 전자공학과, 인하대 전자공학과를 차례로 거치며 전자 회로 설계 지식을 쌓았다.한국에 반도체 산업이 태동하던 1985년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입사한 그는 엔지니어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공고 시절부터 쌓은 탄탄한 지식에 실무 경험까지 갖추자 업계에서는 일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이 황 회장을 눈여겨보다 스카우트를 제의했고 고심 끝에 이직했다.
하지만 ASM이 1993년 한국 시장을 철수하면서 황 회장은 재취업과 창업의 갈림길에 섰다. 당시만 해도 국내 반도체 산업은 수입산이 주류였다. 국내 기업은 원천기술이 없다 보니 단순 하청 주문만 받았다. 전자 회로 설계에 누구보다 자신 있던 그는 창업을 선택했다. 해외에선 한국이 무슨 반도체 장비를 만드냐고 비아냥거렸다.황 회장은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1993년 주성을 창업했다. 기술적 난제에 봉착할 때마다 한국 엔지니어에 대한 해외의 야박한 평가를 상기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1995년 반도체 D램 제조의 핵심인 커패시터(capacitor) 전용 증착장비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핵심 장비의 국산화에 성공하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업계에는 '황철주'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주성은 특허 건수 3000개 이상을 갖춘 회사로 성장했다. 특허 상당수는 황 회장이 직접 개발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들던 시절"이라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점이 가장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옥에 대형 태극기 내건 이유
황 회장에게 '혁신'은 수사(修辭)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다. 혁신하지 않으면 죽고 만다는 절박함이 몸에 배어있어 '혁신 중독자'로 불린다. 그의 신념은 경영 어록으로 응축돼 R&D센터 곳곳에 새겨져있다. "혁신은 1% 사소함의 누적이고, 신뢰는 99% 협력의 결과이다" "전쟁에서 지면 노예가 되고, 경쟁에서 지면 거지가 된다" "변화하는 만큼 성장하고, 차별화된 만큼 성공한다" "경쟁력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잘하는 것이다" "남만큼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등의 문구가 대표적이다.그가 혁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픈 역사가 있어서다. 반도체 증착 장비로 내수의 95%를 장악하며 신화를 썼지만 갑작스레 주 거래처와 관계가 끊기면서 '주성은 끝났다'는 루머가 돌았다. 기술과 자금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불안에 떨던 직원 절반이 회사를 떠났다. 황 회장은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고 답은 '혁신'이었다"고 회상했다.사옥에 태극기를 내건 것도 그때부터다. 2000년 초 미국 출장길, 애리조나 피닉스의 한 주유소에서 마주친 대형 성조기는 황 회장에게 애국심과 국격, 책임감이라는 영감을 심어줬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황 회장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다시 R&D에 매진했고 반도체 기술력을 발판 삼아 디스플레이 증착 장비로 영역을 넓혔다.황 회장은 반도체는 언제든 업황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반도체 기술을 다른 산업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주성이 만든 디스플레이 플라스마 화학 증착 장비는 국내외 주요 고객사에 공급됐다. 태양광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반도체가 막히면 디스플레이로, 디스플레이가 막히면 태양광으로, 태양광이 막히면 다시 반도체로 위기를 뚫었다. 황 회장은 "세 가지 사업은 전기와 빛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언제든 융복합이 가능하다"며 "주성은 사업적인 유연을 갖고 있어 위기에 강하다"고 했다.반도체 업황 하락에도 주성은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새로 썼다. 연결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4379억원, 1239억원을 기록해 각각 전년 대비 16.1%, 20.7%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28%에 달했다. 제조업에서 30%에 육박하는 영업이익률은 매우 이례적이다.
호실적에도 황 회장은 혁신을 강조하며 분위기를 잡고 있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을 둘러싼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엄중해서다. 황 회장은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는 세계 1등이지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은 취약하다"며 "소부장을 육성하지 않으면 반도체 강국 지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용인=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