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통해 전쟁 속 평화 얻었죠"…80세에 돌아본 시인의 삶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신달자
민음사
180쪽│1만2000원
“아픔과 시련과 고통과 신음과 통증들은
모두 나의 양 떼들이라

나는 이 양들을 몰고 먹이를 주는 목동” (‘나의 양 떼들’)
17번째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을 출간한 신달자 시인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몸에 대해 오만했던 젊은 시절을 반성했다”며 “내 몸, 그리고 앓는 몸을 가진 분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집이다”고 말했다.

1943년에 태어난 그는 올해 팔순을 맞는다. 내년 등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글을 써오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원로 시인이다. 그는 산수(傘壽)의 나이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표제에 등장한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제목은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어려서는 그저 관념적으로 지나쳤던 그 제목이 노년에 이르러서 새롭게 느껴졌다”고 했다.

시에서 묘사한 그의 부엌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다섯 개의 칼’과 ‘쇠뭉치 방망이’, ‘날 선 가위’가 도사린다. 냉동고엔 얼린 고기가 쌓여 있고, 냄비에는 짐승의 뼈가 푹 고아진다. 서랍장엔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날마다 눈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죽음의 공포가 널려 있는 부엌에서 매일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시인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부엌의 풍경에 주목했다. 시인이 바라본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간도 늘 ‘삶’이라는 전쟁 속에 있다”며 “그 속에서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인의 삶도 전쟁 같았다. 막내를 낳자마자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24년간 그의 곁을 지켰다. 병원비를 내고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양복천을 파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 물리학자 고시바 마사토시가 노벨상을 받으며 한 말을 되새기며 버텼다고 한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선 굴욕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역경 끝에 남은 것은 늙고 아픈 육체였다. 2005년 암 투병을 한 데 이어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졌다. 작년에는 장기 일부를 떼 내는 수술을 했고, 코로나19로도 몸져누웠다. 그의 몸은 ‘마약성 진통제 수액이 종일 안을 적시고’, ‘칼자국 흉터만 곳곳에 낙관처럼 찍힐’만큼 상했다.

지칠 때마다 그의 곁을 지킨 건 ‘시’였다. 그는 “수술대에 눕는 순간에도 ‘이걸 어떻게 시로 쓸까’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전쟁 같은 삶에서도 시를 통해 평화를 볼 수 있었다”며 "병을 앓으면서도 삶을 미워하는 대신,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인에게 시는 어떤 존재일까. 그가 시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라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일기장을 들춰봤는데 매일같이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홀로 울었다’라고. 시인은 “어렸을 때 왜 아버지가 혼자인지, 왜 우는지 알고 싶었다”며 “사람의 마음을 보기 위해 문학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쉬지 않고 시를 쓴 지 6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부족하다는 반성을 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몸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너무 징징거린 것 같다”고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이어 “또 한 편의 시집을 낸다면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