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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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예술일까 오락일까?
아니면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현실의 그 어딘가를 비추는 거울일까?<죠스(1975)>로 블록버스터를 창시하고 <인디아나 존스>로 프랜차이즈 시리즈를 탄생시켰으며, <쥬라기 공원>으로 컴퓨터 그래픽 효과의 가능성을 입증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할리우드 산업시스템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쉰들러 리스트(1994)>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로 12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흥행의 귀재 수식어와 예술적 성취까지 이뤄냈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경계 속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모든 기대를 충족시켜왔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하지만 그의 신작, <파벨만스>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오롯이 자신의 기억과 과거, 가족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만 집중한다.올해로 76세가 된 노년의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본인이 사유하는 영화의 단상을 지극히 소박하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영화를 좋아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아픈 상처까지.
그가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파벨만스>를 통해 차분히 들여다본다.
<파벨만스>의 시작점
<파벨만스>는 1999년, 그의 누나 앤 스필버그가 쓴 각본으로부터 시작된다. 앤의 시나리오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가족사를 솔직하게 담고 있다. 스티븐에게 이 각본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서 쉽게 열어볼 수 없는, 절대 영화로 완성할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이었다.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제7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 2001년 <에이아이>를 발표한다. <에이아이>는 원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집필해왔던 시나리오다.일종의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전개하고자 했으나 자신이 연출하면 지극히 염세적인 이야기로 변질될 우려에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맡긴다.
<에이아이>가 공개되었을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경험이 반영되었다는 고백을 인터뷰에서 전했으나 그 경험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앤 스필버그의 각본을 절대 영화로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에이아이>에 조금이나마 반영되었는지도 모른다.
11년 만에 스필버그가 작가로 참여한 작품
<에이아이> 이후 스필버그는 11년 만에 <파벨만스>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그가 직접 집필한 작품은 생각보다 몇 되지 않는데 <미지와의 조우(1977)>, <폴터가이스트(1982)>, 그리고 <에이아이>와 <파벨만스>가 전부다.초기 두 편이 그의 장르적 감각과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후기 두 작품은 자전적 경험이 어떻게 영화 속에 반영되어 있는지 엿볼 수 있다.
특히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의 구원을 다룬 <에이아이>가 스필버그와 부모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면, <파벨만스>는 가족의 고통으로부터 영화가 어떻게 자신을 구원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하지만 세상은 인정하지 않는 무언가에 진심으로 매달리며 구원받는 주인공 서사는 이 두 작품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가상 게임 세계의 비밀을 밝혀 세상을 구원하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웨이드, 아일랜드 이민자로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인 마리아와 사랑에 빠져 금기를 넘어서는 토니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는 유년 시절의 경험들이 DNA처럼 각인되어 있다.
유대인으로서, 이혼 가정의 자녀로서, 어린 시절의 어두운 경험을 영화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항상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희망의 세계였다.
해피엔딩의 가족중심 서사를 주로 만들어온 것 또한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해피엔딩을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파벨만스>의 또 다른 작가, 토니 쿠쉬너
<파벨만스>의 시나리오는 스필버그 감독과 <뮌헨(2005)>, <링컨(2012)>,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로 호흡을 맞춘바 있는 토니 쿠쉬너 작가가 맡았다.퓰리처상과 에미상을 석권했던 쿠쉬너 작가의 데뷔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작년 국립극장 레퍼토리로 선정되어 정경호 배우가 프라이어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됐다. 작품에는 유대인이자 성소수자인 토니 쿠쉬너 작가의 삶의 경험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스필버그 감독은 누나가 집필한 원작 시나리오를 <뮌헨> 작업 당시 쿠쉬너 작가에게 들려주었고, 작가는 감독에게 언젠가 이 영화를 꼭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자신의 사적 경험을 작품으로 승화시켜본 경험이 있는 작가이기에 더욱 진심으로 전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감독은 앤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부모님에게 상처 주는 일은 아닐까 두려워했다. 또, 영화를 만든 자신을 부모님이 오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201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2019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들며 <파벨만스>의 시놉시스가 완성되었고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은 2020년 10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하고 7일이 지난 뒤였다.
‘파벨만’과 ‘스필버그’의 상관관계
쿠쉬너 작가는 ‘파벨만’이라는 주인공 가족의 성을 ‘스필버그’로부터 영감받았다고 한다. 이디쉬어로 스필버그Spielberg는 연극의 산이란 뜻인데, 스필러spieler는 연기자를, 스필spiel은 연설 또는 연극을 뜻한다.작가는 스필버그가 세기의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에 우화를 뜻하는 독일어 Fabel을 덧붙여 파벨만을 완성했다. 그리고 샘 파벨만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고 애정하는 청년인지 흥미롭게 그려낸다.
어린 샘은 부모님과 함께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보러 갔다 영화에 매료된다. 기차가 전복되는 장면에 깊게 매료된 그는 부모님이 선물해준 기차 장난감을 망가트리며 같은 장면을 수없이 재현하려 애쓴다.
이를 부모님이 사준 카메라로 기록하여 반복해 볼 수 있도록 한다. 결국 이 카메라가 그의 평생을 결정짓게 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샘에게 영화는 가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실재적 체험이었다.
그는 현실의 특정 부분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고 과장할 수 있는 영화의 매력에 심취한다. 그리고 영화 카메라가 자각할 수 없던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고 폭로할 수 있음을 깨닫고 고민에 빠진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영화가 주는 환상적인 환영들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떠나 더없는 꿈과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발 딛고 서 있는 고통의 땅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불이 꺼지면 환상에 젖다가도 불이 켜지면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는 경험 속에서 샘은 영화의 힘과 매력, 또 다른 가능성을 맛본다. 이것은 스필버그가 한평생 영화를 만들며 깨달은 바이기도 하다.
그에게 영화는 삶에서 절대 경험해볼 수 없는 환상을 주기도 하지만 잊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목도하도록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스필버그가 노년에 <파벨만스>를 제작하겠다 결심한 것도 어쩌면 외면해왔던 자신의 아픈 기억들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다짐의 결과는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스필버그의 작품론은 <파벨만스>를 중심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모든 근원이 <파벨만스>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동윤 | 영화 평론가
*본 칼럼은 CJ그룹 뉴스룸과 CJ CGV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