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 올랐지만…한순간에 몰락해버린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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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옥미나의 아트하우스 칼럼 - 왕좌에 오른 마에스트로의 몰락
여기 완벽하게 보이는 업계의 거장이 있다.여기까지는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그렇고 그런 세상 이야기다.
탁월한 실력으로 평단과 대중에게 골고루 명성과 인기를 누리며, 자신의 책을 출판하고 마스터클래스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누군가 자살하고, 자살의 원인으로 그가 지목되면서 귄력형 비리와 횡포에 대한 추문은 빠르게 확산된다.
그는 결국 왕좌에서 축출되고, 업계의 변방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진다.
하지만 주인공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최초의 여성 수석 지휘자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게다가 그 지휘자가 케이트 블란쳇이라면. 다른 방도가 없다. 우리는 꼼짝없이 그 영화를 봐야 한다.
예술가와 예술을 분리할 수 있는가?
영화의 표면에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예술가와 예술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의 인생은 짧아 예술만 길던 시절에는, 위대한 작품을 창조한 몇몇 예술가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바흐의 여성 혐오 때문에 바흐의 음악은 다루고 싶지 않다’라는 학생의 발언은 타르에게는 신성모독이다. 음악에 대한 존경을 들먹이고, 다양한 예술가들의 사례를 거론하다 급기야 인종과 성적 지향성까지 동원해가며 상대를 편협한 혐오와 차별로 몰아붙인다.타르에게 예술이란, 그것을 창조한 사람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무엇이며, 그리고 그런 작품을 창조한 이들이라면(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므로) 세간의 윤리로 감히 평가해서는 안 되는, 면죄부를 손에 쥔 특별한 이들 같다.
하지만 이 신념이 그녀의 삶까지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이 영화의 표층 서사에 해당한다.
타르가 움켜진 왕좌, 이를 뒤흔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영화의 초반, 리디아 타르는 이미 왕좌에 앉아 있다. 타르에게 권력은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하고 증명한 것이다.
전 지휘자를 알뜰히 챙기고, 체스판 돌을 옮기듯 오케스트라에서 누군가를 제거하고 누군가를 들인다. 그녀가 가진 권력의 범위는 해당 오케스트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계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라서, 그녀의 눈 밖에 나면 어디에서도 연주할 수 없다.타르는 자신이 이미 결정한 사안을 마치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동료들에게 내미는 정치적인 수완에도 능숙하다.
강압적이나 노골적일 필요 없이 암시와 동의만으로 모든 것은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된다.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리디아 타르는 권력이 욕망하고 작동하는 은밀하고 촘촘한 방식 그 자체를 보여준다.그런데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 (158분이나 되면서!) 바로 타르의 왕좌를 뒤흔들게 되는 그녀, 타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래 이상한 애’의 얼굴이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이 추문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는 일에 토드 필드 감독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머리카락 휘날리는 사진 한 장과 이메일 제목, 통화 목록으로 존재할 뿐이다. 샤론이 당신의 모든 관계는 ‘거래’에 불과했다고 사납게 쏘아붙이지만, 분노에 찬 연인의 일갈을 타르의 인생을 관통하는 진실로 믿어도 될까?
우리는 조악하게 편집된 마스터 클래스의 영상에서 이미 누군가의 선명한 악의를 목격하기도 했다. 관객들은 리디아 타르가 어떤 사람이고 정확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녀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저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처럼 소문에 의지해 어떤 일들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부패한 권력자의 몰락을 보여주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이야기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예술의 윤리적 재구성
영화에서 감지되는 것은 시대의 변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다. 타르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시혜’를 베풀지만, 올가는 그것을 타르 방식의 구애 혹은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한 거래로 인식하지 않는다. 타르의 비위를 맞추거나 굴종할 의향도 없다.오히려 올가는 ‘여자라서 불편한 것은 딱히 없었다’는 타르를 은밀히 경멸하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이제껏 기존의 권력자들과 타르가 누렸던 권력의 ‘묵시적인 룰’은 이제 더 이상 묵시적으로 발휘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결국 타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소문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일부다. 이제 영원히 안전한 예술의 권력은 없고, 현재의 관점과 윤리를 기준 삼아 역사와 예술은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영화의 후반, 타르는 ‘어항’ 앞에 마주 선다. 어항 속에 있는 여자들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녀들의 운명은 ‘낚시꾼’에게 달렸다. 5번 번호표를 단 여자만 유일하게 타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아마 타르는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말러 교향곡 5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쯤 타르는 권력이라는 괴물의 습성도 정확히 깨달았을 것이다.
권력을 쟁취하고, 권력에 도취되고 그래서 자신을 권력과 동일화하며 어떤 것들이 쉽고 당연해졌겠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권력으로 얻은 것들은 권력이 사라지는 순간 모두 함께 사라졌다.영화는 타르라는 인물과 그녀의 삶에 대한 판정 가능성을 관객들에게서 거둬가는 대신, 권력이 인간에게 발휘하는 유혹과 기만, 중독과 폭력의 성질에 집중한다.옥미나 ㅣ 영화평론가
*본 칼럼은 CJ그룹 뉴스룸과 CJ CGV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