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잃고 혼자 산 죄책감…불행 딛고 우뚝 선 풍경화의 대가

'독일 낭만주의 거장' 카스파 프리드리히

자신 살려주고 익사한 동생
평생 동안 트라우마로 남아

'위대한 자연' 강조한 풍경화로
잠깐 인기 끌다가 곧 잊혀져
20세기 말에서야 재평가 받아
열세 살은 마음의 병을 앓기에 어린 나이다. 하지만 독일 낭만주의 거장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우울증은 이 나이에 시작됐다. 한 살 어린 동생이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익사한 뒤였다. 프리드리히의 삶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차례로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절친한 친구는 강도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냈으나 금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고, 말년에는 줄곧 아팠으며 가난했다.

프리드리히는 1774년 독일 북동부의 도시 그라이프스발트(당시 스웨덴)의 중산층 가정에서 열 명의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괜찮았지만, 일곱 살 때 겪은 어머니의 병사를 시작으로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열세 살 때 동생이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사건은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는 이후 삶과 죽음, 계절의 순환 등 세상의 섭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이듬해부터 프리드리히는 예술을 시작했다. 택한 장르는 풍경화. 당시 유럽 미술계에서는 풍경화를 시시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평범한 사물을 볼 때도 우주의 원리와 신의 존재를 생각하던 프리드리히는 ‘대자연이야말로 세상의 섭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마음속 여러 풍경을 섞어 재구성했고, 안개·어둠·빛 등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프리드리히는 금세 풍경 화가로 두각을 보였다. 스물한 살 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이후 그림이 잘 팔리기 시작했다. 40대 초반에는 드레스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행복은 금세 끝났다. 결혼 2년 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이 산책하러 나갔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면서 마음속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게 시작이었다. 하필 이 시기 유럽의 미술 유행이 급변했다. 프리드리히가 그리던 낭만주의 그림은 ‘한물간 스타일’ 취급을 받았고, 이 때문에 예술 학교에서도 학과장 승진에 실패했다. 계속 그림을 그리며 재기를 노렸지만 그는 뇌졸중 발작을 비롯한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가 66세의 나이로 불운한 삶을 마감했다.사후 잊혔던 프리드리히는 20세기 말이 돼서야 제대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에는 그의 그림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종교와 신앙에 관련한 해석, 미학적인 위대함을 뜻하는 개념인 ‘숭고’를 중심으로 한 해석, 낭만주의라는 예술 사조에 관한 해석, 심지어 비밀 조직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그림이라는 의견까지 있다.

속 시원한 정답은 없다. 다만 프리드리히가 남긴 “예술의 유일한 근원은 바깥 세계가 아니라 예술가 마음속 깊은 곳의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이라는 말을 힌트 삼아, 작가의 삶을 통해 작품을 해석하면 이렇다.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속 남자는 작가 자신이자 모든 인간을 상징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맞서고 장렬하게 싸운 끝에는 죽음이라는 패배가 예정돼 있지만, 그 모습은 아름답다는 점에서다. “세속적인 것에 고결한 의미를, 일상에 신비를, 알고 있는 것에 진기한 특징을, 유한에는 무한을 부여하는 것”(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이라는 낭만주의의 정의는 이렇게 그림을 통해 우리네 삶과 만난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사와 고고학 등을 주제로 매주 토요일 인터넷에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