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윤의 부드러운 재료'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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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리윤의 부드러운 재료날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본다. 사진을, 그림을, 조각을, 영화를, 퍼포먼스를, 책을, 온갖 곳에 흩뿌려진 말과 글과 이미지를. 살아 있음은 무언가를 목격하는 사건과 떨어질 수 없이 견고하게 엉켜 있다.
나는 목격자이자 관람자로 나의 생활과 내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살아가는 시간, 출발하거나 스쳐 가거나 잠시 머물거나 도착하는 장소를 거닌다. 타자가 목격하고 관찰해 온 세계와 그이의 눈과 손, 불확실한 기억과 미약한 기록, 앎과 모름, 기분과 마음, 응시와 외면, 무엇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은 무엇이 되어 나의 응시 앞에 놓여 있나. 우리 사이에는 필연적인 시차가 있고 피할 수 없는 뒤엉킴이 있다. 내가 본 것과 관람자로서의 나 사이에 놓인 거리와 그 거리를 굴러다니는 시간. 일종의 완결을 맞은, 완성된 이미지로 눈앞에 놓인 것들은 응시의 맞은편에서 다시 일부가 무너지고 흔들리고 금가거나 깨진다. 우리는 미완의 이미지로 만나고 뒤엉키며 생활, 삶, 기억, 망각, 시간과 엮인 얼룩덜룩한 덩어리가 된다.
'부드러운 재료'는 관람자로서 내가 마주하는 것들을 재료 삼아 부드러운 입구를 만들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향해 나아가려는 글쓰기다. 이미지 너머에 생산자—작가가 존재하는 것, '작품'이라는 단어로 거칠게 묶을 수 있는 일련의 것들을 재료로 둔다.
그러나 이 글들은 해당 작품을 원본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도, 묘사하는 것도, 소개하는 것도, 정교하게 이해하는 것도 목적이 아니다. '부드러운 재료'는 입구를 내어준 공간으로부터, 작품으로부터 멀어지며 입구를 희미하게 만들려 한다. 돌아갈 곳을 자발적으로 잃어버리려 한다. 가볍게 바닥을 구르고 허공을 떠돌다 만나서 뒤엉키는 먼지들처럼 관계 맺으려 한다. 서로의 부드러운 재료가 되려 한다.
보기. 믿기. 믿음을 무너뜨리기. 의심하기. 질문하기. 오해하기. 착각하기. 사랑에 빠지기. 사랑하기. 실수하기. 이해하기. 이해하기에 실패하기. 실패를 기록하기. 실패를 망각하기. 달아나기. 딴청 피우기. 반복하기. 반복을 끔찍하게 여기기. 어제 본 것을 오늘 또 보면서 새롭게 깜짝 놀라기. 멀어지기. 맴돌기. 구멍 내기. 작은 구멍을 아주 많이 뚫음으로써 안팎을 모호하게 만들기. 구멍을 통해 너머를 보기. 점점 깊어지는 구멍 안으로 뛰어들기. 바깥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바깥을 내부의 깊이로 만들기.
'부드러운 재료'에서 가능하기를 바라는 일들의 일부다.
2023년 5월
김리윤
김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