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리퍼블릭은행 주가 50% '폭락'…SVB 전철 밟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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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시그니처은행 파산 이어 줄도산 오나
25일 실적발표에서 "예금액 40% 줄었다"
15분 구조조정안 발표 뒤 질의응답 안 해
정부 관리 체제, 자산 매각 등 방안 거론
장기지방채·모기지대출 팔면 손실 불가피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처은행에 이어 또 하나의 미국 은행이 파산 위기에 놓였다. 한때 시가총액이 약 48조원(360억 달러)에 달했던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이다.
25일(현지시간) 실적발표가 도화선이 됐다. 퍼스트리퍼블릭이 지난해 말과 비교해 보유 예금이 40% 줄었다고 발표하자 주가는 50% 가까이 폭락했다. "(자금 안정화를 위한)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지만 시장에서는 퍼스트리퍼블릭이 재기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파산 위기 맞은 미국에서 18번째로 큰 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 1985년 설립된 샌프란시스코 지역은행이다. 지난해 6월 기준 자산이 1980억달러(265조원)에 달해 미국 내 18번째로 큰 은행으로 꼽혔다. 미국 전역에 85개 지점을 두고 있다.퍼스트리퍼블릭의 첫 번째 위기는 같은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SVB가 파산하면서 왔다. 지난달 10일 SVB가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으로 문을 닫자 인근 지역은행으로 여파가 번졌다. 스탠다드 앤 푸어스(S&P)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퍼스트리퍼블릭의 투자등급을 적격(A-)에서 투기(BB/BB+) 등급으로 낮췄다. 지난달 10일 81.76달러였던 주가는 주말을 거친 13일 31.21달러로 떨어졌다. 그러나 11개 미국 대형은행이 위기에 몰린 퍼스트리퍼블릭에 300억달러(39조원) 가량을 수혈하면서 급한 불은 껐다.
잠잠해진 듯했던 퍼스트리퍼블릭 위기설은 이날 발표를 계기로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왔다. 퍼스트리퍼블릭은 지난달 31일과 비교해 예금 잔액이 전년 대비 40.8% 감소한 1045억달러(139조원)라고 발표했다. 수혈 자금 39조원을 빼면 손실률이 57%가 넘는다. 놀란 투자자들은 퍼스트리퍼블릭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전날 주당 16달러였던 주가는 49.38% 떨어져 8.1 달러로 마감했다.
"전략적 옵션 추구한다"지만 질문 안받은 임원진
퍼스트리퍼블릭은 이날 실적발표에서 자본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임원 보수를 대폭 삭감하고, 올해 2분기에 인력 약 20~25%를 감축하는 등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자본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옵션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 옵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임원진은 질문을 받지 않고 15분 만에 발표를 마무리했다.로이터통신은 퍼스트리퍼블릭이 지난 24일 자본 안정화 방안을 비공개로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한 관계자는 퍼스트리퍼블릭이 미국 정부가 사모펀드와 대형 은행 등을 소집해 도울 것을 원한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구제 방안으로는 △FDIC(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 관리체제 △자산 매각 △배드뱅크를 통한 부실채권 및 인수 및 채무 재조정 등이 거론된다.
우선 FDIC에 은행을 넘기는 대신 예금 전액을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 안이 있다. FDIC는 SVB 파산 당시에도 이러한 조치를 한 적 있다. FDIC는 예금 지불, 폐쇄 금융기관 관리, 파산은행 재건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연방 독립 기관이다.
배드뱅크는 정부 주도로 공적 기금을 투입해 대출채권을 매입하고 상환 일정을 조정하거나 채무 감면을 지원하는 방안이다. 부실 자산을 우량 자산과 분리해 처리해 '배드뱅크(bad bank)'로 불린다. 다만 웨드부시 증권사의 데이비드 치아베리니 애널리스트는 "퍼스트리퍼블릭의 대출과 유가증권이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나리오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1000억달러' 매각 유력하지만 SVB 따라갈 수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안은 최대 1000억달러 자산을 매각하는 방법이다. 블룸버그는 퍼스트리퍼블릭 관계자를 인용해 이같은 안이 내부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형은행 등이 퍼스트리퍼블릭 자산을 구매할 경우 우선주를 지급할 수도 있다.문제는 퍼스트리퍼블릭이 자산을 헐값에 팔아넘길 경우 미실현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SVB가 파산한 경로를 퍼스트리퍼블릭이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는 뜻이다.
퍼스트리퍼블릭의 자산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장기 주택담보(모기지) 대출과 지방 장기채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안전자산으로 평가되지만 만기가 길어 환금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문제는 미국 중앙은행(Fed)이 지난해부터 기준금리를 급격히 높이면서 채권 금리가 높아졌고(채권 가격 하락) 이들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지금 주택담보대출과 장기채를 매각할 경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대규모 미실현 손익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뱅크런이 일어났고, 결국 파산에 이른 SVB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신용평가기관인 피치의 북미은행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울프는 "누군가가 퍼스트리퍼블릭을 인수한다면 금리 주기를 감안할 때 일부 자산에 대해 취해야 할 상각(고정 자산에 생기는 가치의 소모를 계산)이 있을 것"이라며 "이 옵션은 매우 도전적이고 특히 주주들에게 매우 큰 비용이 들 것이다.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