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양주에 가면 '정신나간 8명' 팔괴 기념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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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종영의 아트차이나-양주팔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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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팔괴’라고 부른 것은 양주 방언의 ‘축팔괴(丑八怪)’라는 말이 ‘멍청이, ‘정신나간 놈’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평범한 백성이 정치에 대해 논하거나 사회를 비판하는 일은 중죄로 다스렸는데 양주팔괴 화가들은 서예, 그림의 기법과 내용이 대담하고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글 또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 해왔기 때문에 양주팔괴에 애정을 가진 백성들이 그들이 처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원래 정신나간 놈, 괴짜들이니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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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는 수(隋) 양제때 경항대운하(북경-항주)의 주요 지점이 되면서 경제력이 가장 높은 도시로 화려하게 발달하였다. 당송 때에는 신라를 비롯한 페르시아, 아랍상인들이 이곳에서 무역거점을 이룬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신라 최치원도 이곳에서 유학하고 벼슬을 했으며, 마르코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을 아름다운 wonder land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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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 염상들은 자신의 사치스러운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공예품이나 진귀한 보석, 각종의 맛있는 음식과 서화를 찾곤 했는데, 기존의 틀에 갇힌 보수적 작품들보다 더 새롭고 진취적이며 개성이 강한 작품을 소장함으로써 자신의 미적 수준을 뽐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유행에 따라 양주로 많은 화가가 몰려들게 되었고, 개방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양주팔괴”가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화가 중 일부는 잠시 관직에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서민들이었다. 그들의 시와 글은 은근한 필체로 구애받음이 없이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것들이 많았고, 삶이 힘든 평범한 백성들의 공감을 얻었다.
양주팔괴의 대표적 인물 중 두 사람을 꼽자면 단연 ‘금농(金農)’과 ‘정판교(鄭板橋)’일 것이다.
정판교(鄭板橋)의 이름은 섭(燮), 판교는 호이며, 강소성 흥화(興化) 사람이다. 1736년 진사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권부의 미움을 사 파직됐고, 말년에는 양주에서 서화를 팔아 생활했다. 대나무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칼날 같은 대나무 잎의 농담과 깎은 듯 우뚝 솟은 바위의 형상으로 독특한 화풍을 이뤘는데, 정판교의 대나무 그림은 전통적 기법을 초월한 청초하면서도 강인한 기세를 담고 있다. 대나무 그림에 대한 그의 화론(畵論) 역시 중국 회화사에서 중시되고 있다.
양주팔괴의 정신은 당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철학이 되었던 것 같다
유명한 장판교의 글씨 ‘난득호도(難得糊塗)’는 말 그대로 ‘어리석어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훈으로 쓰이는 문구이다.聰明難, 糊塗難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由聰明轉入糊塗更難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기는 더욱 어렵다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집착을 버리고,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니
非圖後來福報也 이는 훗날 복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