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누이와 결혼하고 싶다"…'대체된 아이'가 찾는 사랑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빈센트 반 고흐 '숲에 있는 여인(Girl in a Wood anagoria)' (1882년)
빈센트 반 고흐 '숲에 있는 여인(Girl in a Wood anagoria)' (1882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는 유독 여인들의 그림이 많다. 특히 여인들과 관련된 그의 사랑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랑한 대부분의 여인들이 과부, 매춘부,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천재는 광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상 행동을 보인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의 사랑 이야기에는 천재의 광기로만 취급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는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숲에 있는 여인(Girl in a Wood anagoria)'(1882년)에는 그의 상처가 묻어 있다. 그 상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제 이 그림을 통해 그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 보자.

1882년 여름에 고흐는 동생 테오 덕분에 처음으로 유화물감을 살 수 있었다. 그것으로 그린 첫 작품들 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나무 사이로 숲의 향내가 은은하게 감도는 것 같다. 갈색, 노란색 및 녹색 빛깔이 주를 이루며, 원근법 구도에 따라 뒤로 갈수록 나무줄기가 가늘어진다. 여인이 왼손으로 나무에 기댄 것이나 오른손으로 치마를 잡은 모습에서, 여인의 고상한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고흐는 도대체 어떤 여인을 생각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이 1882년 작품인 것으로 보건데, 1882년까지 고흐가 사랑했던 여인들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1882년, 그러니까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그가 이십 대에 사랑했던 여인은 전부 네 명이었다.스무 살에 사귀었던 유진 로이어, 스물여덟에 사랑했던 코르넬리아 포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바로 동거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홍등가의 여인과 또 다른 여인 클라시나 시엔 흐르니크가 고흐의 이십 대 여인들이었다.

이 그림의 제작 연도인 1882년에 고흐는 시엔이라는 홍등가 여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연구가들에 따르면, 이 여인과의 관계는 1882년 1월부터 1883년 11월까지 1년 10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이 시엔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그림에 묘사된 여인은 상당히 고상한 자태를 품기고 있고 상복과도 같은 흰색 옷과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시엔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고흐는 이 우아한 여인을 통해 누구를 표현한 것일까?

엄마처럼 첫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촌 누이

나는 그녀가 늘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거기에 몰두한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고 나서 생각했지. 비록 내가 그녀의 감정을 존중하고 또 그녀의 깊은 슬픔이 나를 감동시키지만 그 속에는 어떤 체념 같은 게 있는 듯하다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1881년 11월 7일)

이 편지에 묘사된 여인은 1881년 여름에 고흐가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던 그의 외사촌 누이 코르넬리아 포스다. 최근 과부가 되어 아홉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고흐의 어머니, 즉 이모 댁을 방문한 사촌 누이는 고흐가 야외에 그림 그리러 나갈 때마다 동행해 주었다. 그녀는 풍경도 볼 겸 대수롭지 않게 따라 나서서는 따뜻한 미소를 띠며 말동무가 돼주었다.

그 몇 번의 대화를 하고 나서, 고흐는 누이에게 아주 뜨거운 연인 감정을 느꼈다. 고흐는 당시 사회 관습이나 사촌간의 결혼을 금하는 법, 교회 전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의 감정을 키워갔다. 이때 사촌 누이는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흰색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흰색 레이스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위의 그림 속 여인이 바로 그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흐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했을 때 코르넬리아는 그 감정이 무책임한 감상에 불과하다고 화를 내며 일종의 모욕감을 표했다. 그녀는 즉시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버렸다. 그 후 이 여인은 고흐를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거절 의사를 다시 한 번 분명히 못 박았다.그렇다면 고흐가 사회적 관습과 법을 무시한 채 코르넬리아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고흐보다 여섯 살 연상인 데다가 정서적으로 훨씬 더 안정된 여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혈통인 코르넬리아는 유전적으로도 고흐의 어머니를 상당히 많이 닮았으며, 그의 어머니처럼 첫아이를 잃은 경험도 동일했다.

또한 그녀는 고흐의 어머니처럼 목사 부인이었던 데다가 고흐의 어머니가 고흐를 낳았을 때와 거의 같은 연령대였다. 그녀는 죽은 첫아이 때문에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고흐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고흐는 어머니와 거의 같은 처지에 있는 이 여인을 사랑하여 구원자가 되고 싶은 동시에,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지금이라도 사촌 누이와의 사랑을 통해 보상받길 갈망했다.
빈센트 반 고흐 '숲 속의 소녀(Girl in the Woods)' (1882년)
빈센트 반 고흐 '숲 속의 소녀(Girl in the Woods)' (1882년)

고흐는 모성애를 느끼는 여인과 여지없이 사랑에 빠지곤 했다. 이십 대에 사귄 여인들을 볼 때, 그 사랑은 고흐의 모성애 결핍과 관련된 듯하다.


‘대체된 아이’가 느끼는 죄책감

고흐는 자신의 엄마에게 죽은 형을 대체하는 아이에 불과했다. 고흐가 태어났을 때, 꼭 1년 전에 사산된 채 태어난 형의 이름을 따라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는 이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고흐는 엄마를 따라 사택 마당에 있는 죽은 형의 묘지에 자주 가서 추모기도를 하는 엄마를 봤다.

어린 고흐는 그럴 때마다 엄마가 자신을 죽은 형의 대체물로 여긴다고 느꼈다. 서운하고 속상한 나날의 계속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늘 비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죽은 형이 아닌 자기 자체로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어떤 날은 형이 죽은 것이 자신의 탄생 때문일 거라는 근거 없는 죄책감에 하루 종일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린 고흐는 엄마의 관심을 받고자 더욱 노력했다. 특히 고흐가 아홉 살이 되어 유독 스케치에 골몰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엄마는 취미로 들판에 나가 들꽃을 그리곤 했는데, 고흐도 그 옆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에게 그림이란 결핍된 모성애를 채우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고, 그럼으로써 엄마의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몸짓이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어린 시절의 엄마를 추억하며 보상하고 보상받으려 했을 것이다.

한편 고흐의 어머니 또한 아이를 사산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한 우울증이 어린 고흐에게 더 큰 결핍을 느끼게 했다. 고흐는 태어나서 죽은 자기와 동일한 이름의 형과 다섯 명의 동생들, 그리고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엄마를 빼앗겼고, 자신은 엄마의 관심 밖이라고 여겼다.

고흐의 마음에는 늘 엄마의 빈자리를 느꼈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 결핍은 상처를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흐가 열여섯 이른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구필 화랑 헤이그 지점의 수습사원으로 들어가서 파리와 런던에서 근무한 것도, 가정에서 충족되지 못한 모성애 때문이었다.

이제 성인이 된 고흐는 자신도 엄마를 대체할 대상을 찾았다. 자신이 형을 대신했듯이, 자신도 엄마를 대신할 상대를 찾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 누이에게 끌리고 집착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고흐의 연애는 어린 시절 결핍된 엄마의 사랑을 대신하려는 욕망,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했던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자살을 시도했을까?

지금까지 고흐의 별난 연애 사건, 자기 귀 베기 등 비정상적인 행동들은 천재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광기의 일종으로 심심찮게 이야기되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터미널이나 역 주변, 쪽방과 같은 사회의 구석으로 떠밀린 한 천재 예술가의 이상행동이었고 결국은 자살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단순하게 취급돼 왔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는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았다. 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설령 고흐가 자살을 시도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택한 방법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최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거론하고 있다.

사회가 좀 더 따뜻하게 그를 보듬어줬다면 비련의 화가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반 고흐는 자신이 평생 얻을 수 없었던 엄마의 사랑,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대상을 찾고자 진지한 삶을 살았다. 고흐는 사랑받고자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인데, 그것들을 일종의 광기라고만 취급하면 놓치게 되는 중요한 진실들이 너무 많다.
나는 세상에 많은 빚과 책임을 지고 있다. (……)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빈센트 반 고흐, '편지'에서

고흐는 생전 처음 갖게 되었던 유화물감으로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불쌍한 사촌 누이, 더 정확히는 죽은 형의 어두운 그림자에 드리운 고운 엄마의 모습을 애써 그렸다.또 그 엄마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고흐는 계속 연민을 느꼈고, 그래서 무모한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거기서 늘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또다시 엄마의 대체물을 찾아 나섰다.

이미 다 성장한 또 한 명의 고흐인 우리도 혹시 어떤 대체물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서로에게 결핍 없는 최선의 관심을 보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또 다른 어린 고흐들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대체물로 여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