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래왔듯 제국은 영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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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심상용의 이토록 까칠한 미술
퇴행
프란시스 데 고야의 1800년 작 <카를로스 4세와 가족들>, 근대의 시발점이 된 궁정 초상화다. 고야는 국왕을 술에 취한 듯하게, 그의 가족들을 심통 사납거나 모자란 듯하게 묘사했다. 오죽하면 프랑스의 미술이론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는 왕과 왕비를 ‘복권에 당첨된 제빵업자 부부’로 묘사했을까.궁정초상화를 이렇게 그리고도 살아남은 게 용할 지경이다. 왜 위험을 자초했는가? 고야가 <카를로스 4세와 가족들>을 그릴 당시, 스페인 왕조는 부패해 몰락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카를로스 4세는 정치는 멀리한 채 향락과 사치품 수집에 빠져있었고, 왕비는 통간 관계인 20대 하급 장교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지경이었다.그렇더라도 왕족의 위엄을 기리기만 하면 그만인 궁정화가로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고야가 그러한 자신의 본분에 대해 위선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근대적 인식이 싹튼 것이다.
고야가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던 즈음(1789), 대서양 건너편에선 훗날 무소불위의 제국이 될 한 나라가 막 독립을 선언했다. 20세기의 대전과 냉전을 겪으면서 세계의 맏형으로 거듭난 이 나라는 자신의 새로운 위상에 상응하고 그것을 제대로 기리는 문화적 조치의 필요성에 눈떴다. 대전 종식과 동시에 추상표현주의의 깃발을 내세우는 것이 그 첫 행보였다. 하지만 한술 밥에 배부르랴. 세기 초 이미 만개했던 유럽 추상의 계보를, 그것도 단번에 추월하는 것은 과도한 욕망이었다. 반면 두 번째 프로젝트 격인 팝 아트(Pop Art)는 대성공이었다. 이 시류를 타고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팝의 황제 앤디 워홀이다.
몰락하는 제국의 악취를 견디기 어려웠던 고야의 인식에서 근대정신의 여명이 촉발되었다면, 신흥제국의 팍스(pax) 여신에 올라타자 마음먹었던 워홀의 것에선 여전히 ‘포스트모던’이라는 신조어로 전략적으로 표명되곤 하는, 근대 이전으로의 역력한 퇴행의 조짐이 읽힌다.
개인에서 다시 국가로의 복귀, 이를테면 아메리카나 팍스 아메리카나가 사유의 기점이 되기, 할리우드와 디즈니랜드 같은 꿈의 산업을 계시의 출처로 삼기, 자국 산 공산품의 품질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최상급의 미(美)의 대상으로 삼기와 같은, 생각 영역에서 확인되는 광범위한 변화를 참고할 것. 워홀과 그의 팝아트 동료들에서 전근대 궁정화가의 20세기적 환생을 보는 건 그래도 조금 지나친 비약일까? 워홀의 팝아트를 대변하는 모티브인 메릴린 먼로는 현대판 마리아 루이사(카를로스 4세의 왕비)쯤 되지 않을까? 신흥 이미지의 제국에서 왕족은 헐리우드나 브로드웨이의 스타들이다. 먼로만큼 헐리우드적인 그러니까 ‘미국 황실’을 연상케 하는 모티브를 달리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게다가 그녀의 비극적 삶은 슬쩍 세익스피어를 소환하기까지 한다. 물론 미국의 소프트 파워에 비극성을 곁들인 레시피일 뿐, 세익스피어는 조금도 거기에 없다! 어떻든 제대로 미국적인, 기념비적인 득템이다.
앤디 워홀은 고속으로 ‘미국 정신(Americanism)’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 존재 자체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한정판 베스트 셀러가 되기에 충분하다.가난한 피츠버그의 이민 2세, 잡초가 무성한 낡은 주택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가난한 청년에서 팝아트의 황제로의 화려한 변신, 하지만 백반증으로 창백한 얼굴을 가리기 위한 선글라스와 손수 염색한 은색 가발, 짙은 메이크업이 필요했다. 이름도 워홀로 개명했다. 이민의 냄새를 풍기는 워홀라라는 이름으로 미국적인 이미지가 되기는 좀 그러니까.
오늘날 다른 동네들과 마찬가지로 이 동네에서도 ‘미국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얼마간은 진실의 옆으로 미끄러지거나 비켜가는 것을 의미한다. 팝아트는 예술의 역사를 저 멀리 물신의 시대로 제대로 되돌려보냈다. ‘거대한 후퇴’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미국적인 것은 소멸되고 만다. 부디 조심하시길! 미국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컨대 은색 가발이나 두터운 메이크업, 선글래스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미지 속에서 꿈꾸게 하고, 꿈에서만 가능한 평화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소위 꿈의 장치들의 반드시 필요하다. 이 꿈의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곧 막강한 기술력과 군사력에서 오는 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앤디 워홀과 아메리칸 팝아트의 공헌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맥락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거짓말
관심과 주목, 흥미 유발, 의지적 실행의 측면에서 보면 워홀의 팝 아트는 조금도 대중적이지 않다. 뉴욕 팝아트의 진짜 주인공이자 수혜자는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부유한 화이트 컬러와 상류층 사람들이었지 그들의 선언문에 단골로 등장했던 것처럼 대중이 아니었다.워홀은 상류층, 특히 부유층에 다가서는 데 주의와 심혈을 기울였고, 예술창작과 부유층과의 전략적 사교를 공간적으로 결합시켰다. ‘팩토리(Factory)’, 이 장소는 창작과 일탈과 오락을 찾아 헤매는 부유층의 사교가 핵융합을 이루는 장으로, 전적으로 워홀이 선구자가 되는 창작물이다. 어느 쪽이 더 주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부는 은색 포일로 도배되고, 곳곳에 거울이 부착되어 데카당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도록 연출됐다. 인테리어가 곧 철학이다! 그곳에서 워홀은 부유한 사람들, 유명 인사들에게만 입장이 허용되는 폐쇄적인 사교 모임을 주도했다. 예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알코올과 약물에 의해 추동되고, 난교와 그룹섹스와 사촌관계인 것이 되었다.
환각을 돕는 그런 중독성 강한 소도구들- 약물, 난교, 그룹섹스..,-를 매개로 하는 예술가와 파트롱의 신 밀월관계의 유형이다. 예술과 자본의 결탁이라는, 또는 ‘예술가와 부유층이 한 통속이 되는’ 같은 무식해 보이는 표현은 지양하도록 하자. 동시에 캔버스에 캠벨수프나 코카콜라가 등장한다고 대중 운운하는 피상적이고 비전문가적인 독해에도 더는 휘둘리지 않기를.
워홀은 대체 어디서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과학을 몸에 익혔던가? 세일즈 맨에서 일약 시카고 최대 백화점 재벌이 되었던 마샬 필드(Marshall Field)라는 인물로부터다. 그로부터 워홀은 생각하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배웠다.
마샬 필드의 경영철학: ‘여성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라.’ & ‘고객은 항상 옳다.’
혹 이 백화점 재벌에게 엄청난 수익을 내더라도 직원들의 노동조합 가입은 결사 반대해야 한다는 철학도 함께 배웠던 것이 아닐까? 마샬 필드는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늘 제국의 통치술의 일환이었다고 쉽게 퉁치지는 말자.
물론 회화와 조각은 역사의 많은 순간 권력이 원하는 이미지 조작에 충실했다. 어떻든 워홀과 그의 뉴욕 팝 아트 동료들이 계승한 게 바로 이 역사다. 그들은 그들의 조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 반하는 진실에는 집단적으로 무관심하고 대체로 무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사 알더라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쪽을 택했다.
예술가의 자율성이 중시되었던 20세기 초에도 정말 사적인 형태의 예술가 지원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전 이후 파트롱 체계의 작동은 크게 달라졌다.
이 새로운 체계에서 파트롱은 변덕스러운 취향의 조급한 단타 매매자, 즉 구매와 매도 주문을 거의 동시에 내는 투기 성향의 비즈니스맨들로 분산되었다. 그 최상위에는 시스템 관리자 제국이 있다. 이 체계에서 예술은 ‘드높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을 드높이는데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신흥제국의 전폭적인 선전 아래, 워홀리즘(warholism)과 워홀 효과(warhol effect)는 지구촌의 동경의 대상을 넘어 심지어 학습모델이 되었다. 서구, 비서구 국가 할 것 없이 지구촌 전체로 확산되어 모방, 재현되었다.
영국의 yBa, 일본 팝(Japan Pop), 중국 팝(Chinese Pop), 한국 팝(korean Pop)…. 남은 것은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아무 대안 없이 주어진 것 중에서만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뿐이다. 팝이거나 팝이 아니거나, 워홀 브랜드 체계를 학습하거나 ‘장기판의 졸’로 내팽개쳐지거나.
진화(?)는 지속된다. 하지만 축복과 저주가 혼합된, 정확히 하면 “축복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저주는 빠르게 증가하는” 진화다. 600명이 넘는 유명인사를 대상으로 했던 워홀의 ‘초상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진화를 거듭해,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에 이르러서는 8,006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예술품의 시대에 이르렀다. 매우 왕조적인 풍경이 아닌가.근 한 세기에 이르는 길고도 집요한 선전과 세뇌의 영향력이 너무 컸던 탓에, 진실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제국은 영원하지 않다. 제국의 철학과 제국의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제국에서 도모되었던 일들은 이미 무게를 속이지 않는 위대한 저울 위에 올려져 있다. 냉정한 평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