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농업적 세계관과 상공업적 세계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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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은 개신교의 창립일이다. 그날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에 면벌부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질문과 선언 95개조를 ‘발송’한다(라틴어로 썼으니 일반인 보라는 게 아니라 교리 토론 하자는 얘기였다. 교회 대문에 붙일 이유가 없다).
직후 교황은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 루터는 교황의 파문 문서를 불살라 버리는 이벤트로 답변을 대신한다. 루터가 말귀를 못 알아먹자 교황은 루터의 영방군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압박한다. “그 자식의 입을 다물게 해주면 당신이 추천하는 후보를 추기경으로 선발하겠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발언에 문제가 있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게다가 그런 모호한 이유로 자신에게 속한 학자를 로마로 보내야 한다는 주문은 납득할 수 없다는 말로 교황의 제안을 뭉갠다. 까이고 뭉개지고 교황의 체면은 엉망이 된다. 결국 사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한 바탕 전쟁을 벌이고서야 일단락된다.
걸고넘어진 건 면벌부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루터는 가톨릭이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선을 화끈하게 넘었다. 그는 선행(善行)과 회개에서 구원이 온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부정했다.
대신 구원이란 신에 대한 복종과 해방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선행의 결과가 구원이 아니라 선행이 구원의 결과라고 원인과 결과를 바꿔버린 파격이다. 루터의 발언대로 하면 신의 대리인인 가톨릭 사제의 입지가 사라진다. 죄는 기독교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선(善)과 악(惡)이라는 개념을 배웠고 기독교인들은 이 악에 죄라는 토핑을 얹었다. 그래서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죄를 회개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고 신을 대신해 고백을 들어주었던 사제와 그들의 우두머리인 교황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너뜨린 것이다.
인간과 신의 직거래, 그게 로마 교황청이 격노한 진짜 이유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앙 도매상과 소매상은 좀 빠져줄래요?”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루터의 이런 발상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략 100년 전인 1415년 체코(당시는 보헤미아) 신학자 얀 후스가 비슷한 얘기를 떠들다가 불에 타죽었다. 같은 노래 1, 2절인데 왜 후스는 죽고 루터는 안 죽었을까. 그것은 후스에게는 없었던 ‘뒷배’를 루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럽 각 곳에서 성장하고 있던 신흥 상공업자들의 자유도시가 루터의 벗바리들이었다. 가톨릭에는 성자와 성인을 기리는 축일이 있고 그게 중세에는 휴일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에 축일까지 더하면 일 년에 거의 백 일을 놀아야 한다(달력 보면 빨갛지는 않지만 ‘뭐뭐의 날’이 겁나게 많다. 그날까지 다 논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은 상관없다. 사람이 놀아도 밀은 자란다. 반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상공업 중심의 신흥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노는 날만큼 손해다.
이들은 가톨릭의 중세적인 교리와 충돌하기 시작했고 낡고 지루한 헌옷 대신 깔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했던 것은 지옥과 연옥이 주는 공포가 너무나 컸고 가톨릭의 논리를 깨부술 대항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가 이 심리적인 부담을 화끈하게 덜어주고 손에 무기까지 쥐어준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종교는 선택이 되었고 축일이 없어진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생산량은 눈에 띄게 증가한다.
종교개혁은 농업적 세계관과 상공업적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이 충돌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생태, 환경은 농업적 세계관의 파생이자 후손이다. 이들은 공업을 싫어하거나 혐오한다. 풍력이니 태양광이니 하며 원전을 봉쇄한다. 툭하면 지구를 살리자고 한다.
우리가 뭘 하든 지구는 관심 없다. 거대한 운석과 충돌하고도 살아남은 지구다. 인간 같은 게 지구를 파괴한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이다. 이들은 당연히 상업도 싫어한다. 상업은 기본적으로 경쟁이다.
시장에는 상품이 있고 선택은 가격과 품질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상업은 죽기 살기로 경쟁한다. 이 경쟁은 사회 각 부문으로 파급된다. 이게 싫었던 특정 교육단체는 학교에서 경쟁을 추방했다. 덕분에 아이들의 학력은 쭉쭉 내려갔다. 그래 놓고 좋단다. 정신승리를 강조하는 조선 성리학의 후예들이다.
마르틴 루터 얘기로 글을 마무리하자.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의 성향이다. 그의 벗바리들과 달리 그는 별로 상공업 친화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하인들과 학교 조교들까지 거의 서른 명이 모여 살았다. 경제에 무심 혹은 무능한 그를 대신해 맥주 공장을 운영하는 등으로 대식구를 먹여 살린 건 그의 아내였다.
루터는 수도원 같은 작은 농업 공동체를 좋아했다. 처음 로마에 갔을 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올리브가 겁나 실하다.” 그때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같은 건 1도 관심 없었던, 정말이지 시골 사제가 마르틴 루터였다.사진은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당시 성경 가격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어떤 집에 책이 딱 한 권뿐이라면 이변이 없는 한 루터의 성경일 가능성이 높았다. ‘속죄양’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같은 표현은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며 만든 말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직후 교황은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 루터는 교황의 파문 문서를 불살라 버리는 이벤트로 답변을 대신한다. 루터가 말귀를 못 알아먹자 교황은 루터의 영방군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압박한다. “그 자식의 입을 다물게 해주면 당신이 추천하는 후보를 추기경으로 선발하겠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발언에 문제가 있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게다가 그런 모호한 이유로 자신에게 속한 학자를 로마로 보내야 한다는 주문은 납득할 수 없다는 말로 교황의 제안을 뭉갠다. 까이고 뭉개지고 교황의 체면은 엉망이 된다. 결국 사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한 바탕 전쟁을 벌이고서야 일단락된다.
걸고넘어진 건 면벌부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루터는 가톨릭이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선을 화끈하게 넘었다. 그는 선행(善行)과 회개에서 구원이 온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부정했다.
대신 구원이란 신에 대한 복종과 해방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선행의 결과가 구원이 아니라 선행이 구원의 결과라고 원인과 결과를 바꿔버린 파격이다. 루터의 발언대로 하면 신의 대리인인 가톨릭 사제의 입지가 사라진다. 죄는 기독교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선(善)과 악(惡)이라는 개념을 배웠고 기독교인들은 이 악에 죄라는 토핑을 얹었다. 그래서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죄를 회개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고 신을 대신해 고백을 들어주었던 사제와 그들의 우두머리인 교황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너뜨린 것이다.
인간과 신의 직거래, 그게 로마 교황청이 격노한 진짜 이유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앙 도매상과 소매상은 좀 빠져줄래요?”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루터의 이런 발상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략 100년 전인 1415년 체코(당시는 보헤미아) 신학자 얀 후스가 비슷한 얘기를 떠들다가 불에 타죽었다. 같은 노래 1, 2절인데 왜 후스는 죽고 루터는 안 죽었을까. 그것은 후스에게는 없었던 ‘뒷배’를 루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럽 각 곳에서 성장하고 있던 신흥 상공업자들의 자유도시가 루터의 벗바리들이었다. 가톨릭에는 성자와 성인을 기리는 축일이 있고 그게 중세에는 휴일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에 축일까지 더하면 일 년에 거의 백 일을 놀아야 한다(달력 보면 빨갛지는 않지만 ‘뭐뭐의 날’이 겁나게 많다. 그날까지 다 논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은 상관없다. 사람이 놀아도 밀은 자란다. 반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상공업 중심의 신흥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노는 날만큼 손해다.
이들은 가톨릭의 중세적인 교리와 충돌하기 시작했고 낡고 지루한 헌옷 대신 깔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했던 것은 지옥과 연옥이 주는 공포가 너무나 컸고 가톨릭의 논리를 깨부술 대항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가 이 심리적인 부담을 화끈하게 덜어주고 손에 무기까지 쥐어준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종교는 선택이 되었고 축일이 없어진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생산량은 눈에 띄게 증가한다.
종교개혁은 농업적 세계관과 상공업적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이 충돌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생태, 환경은 농업적 세계관의 파생이자 후손이다. 이들은 공업을 싫어하거나 혐오한다. 풍력이니 태양광이니 하며 원전을 봉쇄한다. 툭하면 지구를 살리자고 한다.
우리가 뭘 하든 지구는 관심 없다. 거대한 운석과 충돌하고도 살아남은 지구다. 인간 같은 게 지구를 파괴한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이다. 이들은 당연히 상업도 싫어한다. 상업은 기본적으로 경쟁이다.
시장에는 상품이 있고 선택은 가격과 품질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상업은 죽기 살기로 경쟁한다. 이 경쟁은 사회 각 부문으로 파급된다. 이게 싫었던 특정 교육단체는 학교에서 경쟁을 추방했다. 덕분에 아이들의 학력은 쭉쭉 내려갔다. 그래 놓고 좋단다. 정신승리를 강조하는 조선 성리학의 후예들이다.
마르틴 루터 얘기로 글을 마무리하자.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의 성향이다. 그의 벗바리들과 달리 그는 별로 상공업 친화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하인들과 학교 조교들까지 거의 서른 명이 모여 살았다. 경제에 무심 혹은 무능한 그를 대신해 맥주 공장을 운영하는 등으로 대식구를 먹여 살린 건 그의 아내였다.
루터는 수도원 같은 작은 농업 공동체를 좋아했다. 처음 로마에 갔을 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올리브가 겁나 실하다.” 그때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같은 건 1도 관심 없었던, 정말이지 시골 사제가 마르틴 루터였다.사진은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당시 성경 가격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어떤 집에 책이 딱 한 권뿐이라면 이변이 없는 한 루터의 성경일 가능성이 높았다. ‘속죄양’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같은 표현은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며 만든 말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