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혈주의의 비극…합스부르크가의 사도세자 카를로스 이야기

유전의 역사 조명한 '웃음이 닮았다' 출간
신간 '유전자 오디세이'도 나와
유럽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가는 순혈주의를 따랐다. 사촌이 사촌과 결혼하고 삼촌이 조카와 혼인했다.

그 결과, 유전병이 잇따랐다.

아래턱이 심하게 돌출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주걱턱은 이 가문 출신자들의 특징이었다. 이런 사실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해부학자들은 주걱턱을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와 마리아 마누엘라도 사촌지간이었다.

하지만 유전적으로는 훨씬 더 가까웠다. 마누엘라에게 시아버지는 삼촌이었고, 시어머니는 고모였다.

펠리페 2세와 마누엘라의 아들 돈 카를로스(1545~1565)는 이렇게 근친혼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카를로스는 다리를 절었고, 흉골도 기형이었다. 안하무인에다 걸핏하면 울어댔고, 떼를 쓰며 식음을 전폐하기 일쑤였다.

지적장애 기미마저 보였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가 12살이 되자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왕가의 손이 귀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카를로스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했다.

19세가 됐을 때 그의 지능은 7세 수준에 머물렀다.

스물이 넘자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맘에 들지 않는 시종은 창밖으로 내던졌고, 귀족을 살해하려고까지 했다.
신중한 성격 덕택에 '신중왕'이라 불린 펠리페 2세도 왕세자가 온갖 사건에 휘말리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국의 명운을 걱정한 신중왕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아들 방으로 쳐들어가 문을 잠근 후 카를로스를 그 방에 가둬버렸다.

카를로스는 몇 주 뒤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나이 23세 때 일이었다.

펠리페 2세와 돈 카를로스의 사연은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이야기가 후대에 다양하게 변주된 것처럼,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의 이야기도 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상상력을 덧대어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고, 주세페 베르디는 오페라로 선보였다.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카를로스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새롭게 변주되고 있다.
펠리페 2세 시대에만 해도 유전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펠리페 2세의 할머니 후아나 여왕도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이 장애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펠리페 2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아나 공주와 재혼해 아들 펠리페 3세를 낳았다.

펠리페 3세도 사촌과 혼인해 펠리페 4세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주걱턱을 비롯해 여러 유전적 질환에 시달렸다.

유산과 영아 사망 빈도도 증가했다.

유복한 환경 속에서도 합스부르크가의 유아 사망률은 에스파냐 일반 소작농 집안보다 높았다.

결국,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는 몇 대가 지나지 않아 대가 끊겨 몰락했다.

미국의 유명 과학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칼 짐머가 쓴 '웃음이 닮았다' (사이언스북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는 합스부르크가의 사연부터 유전자 조작이 가능한 크리스퍼(CRISPR) 유전자가위까지의 유전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는 서사로 전달한다.

책은 멘델의 유전법칙처럼 익히 알려진 이야기부터 원예의 마법사 버뱅크와 독일의 유전학자 바이스만 등 유전학을 발전시킨 인물들의 치열한 연구 과정, DNA가 발견되면서 무너진 백인종 신화 등 500여년의 유전학사를 소개한다.

'웃음이 닮았다'는 저자의 딸과 아내가 웃는 모습이 닮았다는 데서 착안한 제목이라고 한다.

전미 과학작가협회 사회 저널리즘 과학상 등 다양한 상을 받았다.
이와 함께 DNA의 역사를 조명한 '유전자 오디세이'(사람in)도 최근 출간됐다.

유전자 인류학자 에블린 에예르가 최신 DNA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인류의 이주사를 조명했다.

저자는 인류의 이동 경로와 혼혈의 흔적을 탐색하는 한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 호모 사피엔스의 친척들도 소개한다. ▲ 웃음이 닮았다 = 이민아 옮김. 880쪽.
▲ 유전자 오디세이 = 김희경 옮김. 308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