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자녀교육은 다르군요 [고두현의 아침 시편]

[arte] 고두현의 아침 시편
제자에게

한 줄기 푸른 산 아름다운 경치
조상의 땅 후손이 물려받는구나.
후손들아 얻었다고 기뻐만 마라.
다시 거둬들일 사람 뒤에 있느니.
書扇示門人

一派靑山景色幽 前人田地後人收.
後人收得休歡喜 還有收人在後頭.


* 범중엄(范仲淹, 989~1052) :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
세상 이치를 터득하게 돕는다

범중엄은 뛰어나고 청렴한 재상이었습니다. 실력이나 인품이나 당대 최고였지요. 육경에 통달하고 송나라의 사대부 기풍을 바로 세운 주역인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웠습니다. 제자와 자녀에게도 늘 모범을 보였지요.

이 시에서 밝힌 것처럼 푸른 산의 절경을 보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경탄하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것까지 일깨워줍니다. 시의 원제는 ‘서선시문인(書扇示門人, 부채에 적어 제자에게 보이다’입니다.

큰 인물일수록 꼼꼼하고 따끔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개가한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재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산의 절경을 보고 조상과 후손을 동시에 생각하는 도량까지 지녔지요.

그는 인재 양성과 부국강병의 개혁 조치인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했습니다. 기득권 세력에 막혀 실패하긴 했지만, 나중에 왕안석에 의해 개혁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시에서 땅과 순환의 연결고리를 이야기한 것과 닮았지요.

이 시를 읽다가 선인들의 가훈을 엮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를 다시 펼쳤습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호걸이 되는 일은 내가 실로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너희가 이 가훈을 지켜서 날마다 삼가고 삼가 ‘삼가는 선비’로 불리며 선조에 부끄러움을 끼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이는 신숙주의 가르침입니다. 호걸은 누구나 꿈꾸는 남자의 이상이지만 ‘삼가는 자세’가 없으면 오히려 화의 근원이 되지요. 신숙주는 아들에게 일세를 호령하는 호걸이나 재주 높은 인물이 되려 하지 말고 낮추고 비워서 근학하는 사람이 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난세를 헤쳐온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담겨 있지요.

빼어난 경치를 보고도 후손을 먼저 생각하는데, 하물며 후세를 위한 교육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옛사람의 자식 교육은 이처럼 꼼꼼하고도 따끔했습니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면 호되게 나무라고 벼슬길에 나설 때는 더욱 겸손하라고 가르쳤지요.

손자들 이름도 ‘겸(謙)’ 돌림자로

고산 윤선도는 74세 때 함경도 귀양지에서 집안의 장래를 걱정하며 간곡한 당부 편지를 큰아들에게 보냈습니다. 보물 제482호로 지정돼 해남 녹우당에 보관된 이 편지에서 그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으니 사람의 일도 늘 가득 찼을 때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득 참은 덜어냄을 부르고 겸손함은 유익함을 준다는 지극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라”고 조언했습니다.

면앙정 송순은 어떤가요. 그는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친구들과 술판을 벌인 자식들에게 “이는 머릿속에 살다 보니 빛이 검어지고, 사향노루는 잣을 따 먹는 동안 배꼽에 잣 향내가 스미는 것처럼 사람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물이 드니 부디 유익한 벗을 사귀라”고 충고했다.

명문(名門)이나 명가(名家)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옛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숙종 때 남인과 노론의 당쟁에 휘말려 유배지 진도에서 사약을 받은 김수항은 죽기 전 “언제나 겸퇴의 뜻을 지니고 집안에 독서하는 종자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생전에도 그는 손자들의 이름에 ‘겸(謙)’을 돌림자로 써서 자신을 낮추고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뜻을 일렀지요.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받은 자식이라고 다 훌륭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4대가 연거푸 형벌로 죽은 김수항의 집안은 모진 역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당부를 지켜 가문을 되살렸지만, 신숙주의 넷째아들은 ‘호걸 욕심’을 부리며 서른도 안 돼 재상 자리에 올랐다가 과욕으로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훌륭한 유훈보다 그것을 지키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사례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