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제4차 세계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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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20여 년 전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여기저기서 찬가가 쏟아져 나왔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세계는 평평하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이 책들에서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나라끼리는, 혹은 델의 공급망에 속한 나라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과감한 주장을 폈다.
마크 레빈슨 지음
최준영 옮김 / 페이지2
396쪽|2만원
제조업·투자 중심 세계화 종말
CD 아닌 스트리밍 음악 시대
서비스·아이디어 흐름 커지는
새로운 단계 세계화 진행 중
돌이켜보면 순진한 주장이었다. 맥도날드 매장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세계화 역시 정점을 찍고 후퇴 중이다. 그런데 여기 또 한 명의 낙관주의자가 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쓴 마크 레빈슨이다. 그는 자신을 경제학자, 역사가, 언론인으로 소개한다. 타임,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 등의 언론사를 거쳐 JP모간체이스, 미국외교협회, 미국의회조사국 등에서 일했다. 2006년 펴낸 <더 박스>가 유명하다. 컨테이너의 등장이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책이다.<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서 그는 “세계화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세계화는 제조업 및 외국인 투자와 관련해서는 후퇴하고 있지만, 서비스 및 아이디어의 이동과 관련해서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그는 ‘제4차 세계화’라고 부른다. 즉 ‘서비스업의 세계화’다. 책의 원제가 <상자 밖에서(outside the box)>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품으로 채워진 상자(컨테이너)의 흐름보다 아이디어와 서비스의 흐름이 훨씬 더 중요해진 시대라는 뜻이다. 음악을 CD가 아니라 스트리밍으로 듣게 된 것이 그런 예다.
다만 이런 낙관적인 주장은 크게 힘을 못 쓴다. 저자 자신이 책의 마지막 장에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책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세계화의 역사다. 영어판의 부제인 ‘어떻게 세계화는 물건을 옮기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것으로 변했나’보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2세기에 걸쳐 진화한 세계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책 내용을 더 잘 요약한다.세계화의 역사를 비정통적인 관점에서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이 책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책은 ‘운송 비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300년께 지중해를 오고 간 베네치아 갤리선은 약 115t의 화물을 실었다. 컨테이너 8개 분량에 해당한다. 노잡이들과 그들이 먹을 식량이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다. 운송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을 실어야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향신료, 비단 같은 것들이다. 한 번에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증기선, 실시간으로 먼 나라의 물가를 알 수 있는 전신이 등장한 후에야 국제 무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56년 등장한 컨테이너 역시 세계화에 한 획을 그었다. 그전까지 갖가지 형태의 상품을 배에 싣는 데 2주의 시간과 100명 이상의 부도 작업자가 필요했다. 배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유럽 고객에게 당도할 때까지 3개월 걸렸다. 운송 비용은 상품 가치의 10~20%에 달했다. 열차로 운반한 컨테이너를 그대로 배에 싣는 건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책이 해운업만 다루는 건 아니지만, 해운업과 관련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 특히 초대형 컨테이너선 경쟁이 눈길을 끈다. 2000년대 들어 해운사들은 배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규모의 경제, 에너지 효율성, 환경 개선에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초거대선은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운항 속도도 느렸다. 이전엔 출항이 지연되면 속도를 높였지만, 초대형 선박은 그러질 못했다. 항구에 한 번에 화물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도 생겼다. 게다가 당초 예상보다 물동량이 늘지 않았다. 선복량 공급 과잉에 세계 해운 및 조선업계는 몸살을 앓았다. 책은 한국의 한진해운 파산과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손실이 그 여파라고 설명한다.책은 세계화의 역사를 잘 요약해 보여준다. 해운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금융 등 다른 관점에서의 서술은 부실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해운업 관점에서 세계화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그의 전작인 <더 박스>가 있다는 점도 이 책을 모호하게 만든다. <더 박스>는 2016년 개정판이 나왔다. 600여 쪽으로 이 책보다 두 배가량 두껍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